그러나 내가 아이를 낳고, 제발 살아만 달라 기도했던 이들의 많은 죽음을 겪고 나서세상일이 그렇게 단순하지도, 공평하지도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특히 '암'과 같은 질병은 교통사고처럼 어느 날 갑자기 닥친 불운일 뿐, 자기 관리나 살아온 세월의 상벌이 아님을 분명히 안다. 매일 술을 마실 수밖에없었던 엄마가 지금까지 무탈하게 살아 계신 것 역시 행운이다.
그래도 한 가지,
엄마에게는 외삼촌과는 다른 뭔가가 있다. 사는 게 지옥 같을 때 사람들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 믿는 '자녀 살해 후 자살'을 한다 해도 이상할 것 없는 엄마의 세월이었지만
엄마는 죽지 않았고, 당연히 나를 살렸고, 외할매를 5년이나 살게 했다.
그리고 엄마가 들려준 이십 년 전 에피소드에서 나는 엄마의 비범함을 확신했다.
막내 외삼촌이 암투병 할 때 경제적 사정은 말해 무엇하랴. 엄마는 여전히 밤에 일하고 낮에 삼촌을 간병하러 매일 병원에 드나들었다. 버스비도 아끼느라한여름 땡볕에 한 시간 씩을 걸어다녔던 때다. 지역 내에서 가장 큰 3차 병원이라 정말 많은 사람이 오가는 병원인데, 하루는 병원 로비에서 앞서가던 어떤 아주머니가 갑자기 멈춰 서더니 똥을 싸버리더란다. 입고 있던 바지가 흥건하게 젖었고, 아주머니는 어쩔 줄 몰라 서 있고, 사람들은 쳐다보고, 냄새는 나고.
그 아주머니가 아는 사람도 아니고, 내가 병원 직원도 아니고 나는 내 갈 길 가면 그만인 상황 아닌가.
나는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엄마는 지하 매점에 내려가서 고무장갑과 휴지와 속옷을 손에 잡히는 대로 사서 들고 왔다고 했다.
사람이 나이가 먹으면 그런 어이없는 실수를 할 때가 있다고, 얼마나 부끄러웠겠냐고 엄마는 이십 년 전 얘기에 담담했다.
나는 원체도 리액션이 잘 없는 딸인데다, 뭐라 할 말이 없게 만드는 엄마의 행동이라 그저 가만히 듣기만 했다.
세상 사람을 극단적으로 두 부류로 나누어
자기 자신 돌보기도 빠듯해서 타인에게 무관심한 사람과 자기대신 타인을 돌보는 데 온 에너지를 쏟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당연히 엄마는 후자다.
타인의 곤경을 어떻게 지나치지 않고 내 일처럼 도울 수 있는가? 불쾌하고 역한 오물에 내 손을 댈 생각을 할 수 있는가? 내 마음에 여유라고는 전혀 없는데.
김지윤 소장이 쓴 <모녀의 세계>라는 책에는 그런 내용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K장남도 힘들었지만 그래도 그들에게는 가문을 세운다는 인정과 보상이 따랐다고, K장녀에게는 희생이 당연하게 주어질 뿐 아무런 보상이 없었다고.
하지만 우리 엄마의 세월에 대한 응보는 나라고 믿는다.
엄마가 지난 시간을 후회하고 억울해할 때마다,
"내가 잘됐잖아. 엄마가 그렇게 고생해서 내가 복을 받았잖아. 내가 이만큼 사는 건 엄마 덕분이야"라고 내가 말하는 것은 순도 백이십 퍼센트의 진심이다.
엄마에게 있지만,
외삼촌들에게는 없었던 것.
그건 타인을 불쌍히 여길 수 있는 연민과 동정의 마음이다.
외삼촌들은 자기 자신이라도 불쌍히 여기고 잘 돌봤어야했다. 그렇게 죽지 말고, 우리 모녀 약 오를 만큼 잘 살지. 그래야 미워하든 말든, 따져 묻든 말든, 보상 받든 말든 할 게 아닌가.
지금도 엄마는 '내가 죽으면 내 딸 혼자 어떻게 살겠노'하는 마음으로 산다. 엄마에게 나는 삶의 이유이자 결과인 셈이다.
사람이 삶을 유지하는 데 '타인'만큼 강한 동기가 없는 것을 엄마는 삶으로 가르친다.
덧.
버튼을 잘못 눌러서 그만 연재요일이 아닌데 발행해 버렸습니다. 다음부턴 연재요일을 지키도록 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