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친구 딸이 여상에 갔는데, 일도 하고 공부도 하더라며 취업도 빠를 테니 좋지 않냐고 그 당시중3이던 나에게 은근히 권유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내 성적이 아까웠고(장학금도 받은 성적이라고!), 그때부터 막연히 교사를 희망하고 있었기에 인문계 일반고를 고집했다.
고3 이 되어서 내가사범대에 가겠다고 했을 때는
집 근처 전문대의 물리치료과가 어떠냐고 말해왔다.
한창 물. 치. 과가 뜨고 있을 때였다.
그 당시 직업의 비전이나 나의 적성에 비출 때 물리치료과도 흥미로웠지만 역시 같은 이유로 고집을 꺾지 않았다.
엄마는 그렇다면 무슨 과를 가고 싶냐 물었고, 국어교육과라고 했더니 '영어나 수학이면 몰라도 국어 모르는 사람이 어딨느냐'고 면박을 줬다.
(지금은 엄마도 듣는 귀가 있으니 알 것이다.
문해력이 중요하다는 둥, 국어 성적은 집을 팔아도 안된다는 둥, 독서가 최고라는 둥, 그 비슷한 말 한마디는 들었을 것이다.)
이후로도임용 합격하기 전까지 엄마의 빠른 취업 권유는 계속되었다. 동네 작은 보습학원에서 백만 원을 받았던 적이 있는데 시급으로 따지면 말도 안 되는 처우지만 그때 내게는 큰돈이었다. 벌어본 돈 중에 제일 큰돈.
엄마도 그랬나 보다. 학원 일을 계속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넌지시 물었다. 이제는 나에게 큰 기대도 없는 듯했지만 나는 꼭학교에 갈 거라고말했다.
외할매의 병간호로 시작된 엄마의 밤낮 바뀐 일상은 외할매가 돌아가신 뒤에도 계속되었으므로, '대화'라고 부를 만한 일상 나누기나 정서 교류가 오랫동안 없었다.
엄마와 나는 서로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모를 수밖에 없었다. 가끔 필요에 가까운 대화를 나누고 나면 내 인생의 갈림길마다 엄마가 방해꾼 같기만 했다.
그랬는데내가 교사가 되니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는 거다.육아 휴직이 좀 길어진다 싶으면 딸이 이대로 학교를 때려치울까 봐 불안해했다. 조퇴나 연가를 쓰고 집에 일찍 오면 놀랬다. 무슨 일이 있냐고, 혹시 학교를 잘릴 만한 큰일은 아니냐고.
올해부터 근무 중인 **여고 중앙현관에는 학교의 역사를 보여주는 사진과 연표가 전시되어 있다.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있어 온 학교의 모습을 신기하게 보다가 한 장의 사진에서 엄마 생각이, 엄마가 울면서 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70년이면 우리 엄마가 14살쯤. 엄마는 아무도 없는 집에서 혼자 남동생 밥을 차려야 했고, 불을 땔 나무가 없어서 산에서 나무를 해 오는 길이었는데 친구를 만났다고 했다. 단짝 친구가 교복을 입고 맞은편에서 오더라며, 쪽팔려서 죽을 것 같았다고 "근데 이 얘기가 왜 눈물이 나지"했다. 몇 년 뒤 동네를 떠나 더 이상 교복 입은 친구를 안 봐도 된다는 생각에 속이 시원하더라며 엄마는 좀 더 크게 울었다.
40년 만에 처음 들어본 이야기,
엄마도 처음 꺼낸 이야기였을 것이다.
엄마에게 공부를 한다는 것, 꿈을 가진다는 건 너무나 먼 다른 세계의 이야기였나 보다. 그래서 자신의 분신 같은 딸이 먼 곳을 볼 때마다 좀 더 가능한 세계로 당겨오려고 했나 보다. 실은 엄마도 교복 입고, 학교에 가고, 어떤 대학을 갈까, 공부를 그만할까 계속할까 고민하는 삶을 간절하게 원했을 것이다.
딸이 그 삶을 대신해 살아서 얼마나 좋았을까.
쪽팔려 죽을 것 같았다고 퉁친 그 한마디에 엄마의 서러움과 원망과 억울함이 있다는 걸 이제는 안다.
생의 갈림길마다 통보하듯 말하지 말고,
이왕이면 엄마에게도 물어볼 걸 그랬나.
엄마가 나라면 어떻게 할 것 같아? 하고.
네 인생이니까 네가 알아서 해, 하면서도
딸의 인생을 거울삼아 놓쳐버린 시간이 덜 원망스럽지 않았을까.
모를 일이다, 후회와 원망이 여전할 수도.
엄마를 위해 내가 뭔가를 해 줄 수 있는 것은 없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이렇게 저렇게 덜 후회할 방법을 찾고 있는 나를 자주 발견한다.
나를 위한 선택이 결과적으로는 엄마와 나, 모두를 위한 일이었으니 앞으로도 나 자신을 위해 살 것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