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을 벗자마자 마주하는 중문에 색종이 편지가 붙어 있었다. 떼서 읽어보니 글자 좀 아는 여덟살이 둘째의 이벤트,잠들 때까지 얼굴을 보지 못한 엄마에게 그날 풀어내지 못한 애교가 가득이다.
옷을 갈아입으려 안방 드레스룸으로 가니 화장대 거울에 색종이 편지가 또 있다. 이번엔 글자 대신 그림으로 응석이 가득한 걸 보니 여섯살이 막내의 것이다.
하루치의 피곤이 순식간에 색종이 반의 반만 해진다.
가르쳐준 적도 없건만,
요 방구리만 한 어린이들은 어쩜 이렇게 사람을 행복하게 할까.
색종이에 두세 줄 끄적여 '편지'의 꼴을 갖춘 것을 보며
'유전'이라 생각했다면 좀 과한가?그래도,
나의 서사 안에서는 진지하게 생각해 볼 만하다 여긴다.
엄마와 아빠의 이혼으로 시작한 나의 초등 생활은,
입학한 학교와 졸업한 학교가 다르고 그 사이
거쳐간 학교가 세 곳 더 있다.
친구를 사귀고 관계를 유지할 환경이 아니었으나,
놀랍게도 나에게는 33년 지기 친구가 있다.
이제는 내 전생을 알고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친구,
ㄱ이다.
일곱 살에같이 놀았던 기억이 있고, 이후로 내내 물리적거리가 먼 곳에서 살았는데 어떻게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느냐,
비결은 '편지'였다.
나의 글쓰기 시초다.
나를 둘러싼 환경이 자꾸 변하고 낯선 기분이 가시지 않을 때편지를 보낼 곳이 있다는 건 정말 큰 위안이 됐다. 그래서 이사를 하면 바뀐 주소부터 얼른 알아냈다. 외롭고 불안한 마음이 들기 전에 어서어서 편지를 써서 내가 여기 있다고 누군가에게 전해야 했다.이사한 곳으로 답장이 제대로 올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편지하면 ㄱ은 늦지 않게 답장을 해 주곤 했는데, 덕분에 나의 글쓰기는 이어질 수 있었고, 낯선 공간도 적응할만했다.
어색한 문어체로 안부가 가득한 그 편지들은 아직 간직하고 있다. 어찌 버릴 수 있을까.
여하튼 나에게 글쓰기가 몸에 밴 건 그 시절의 편지 덕분인데, 이제는 내 아이들이 쓴 손편지에 감동하고 있으니 새삼스럽고 신기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