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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정한 시옷 Sep 21. 2024

바라건대 우리에게 우리의 마음 전할 글이 있었더면

아이들 잘 시간이 되어서야 퇴근한 날이었다.

신발을 벗자마자 마주하는 중문에 색종이 편지가 붙어 있었다. 떼서 읽어보니 글자 좀 아는 여덟살이 둘째의 이벤트, 잠들 때까지 얼굴을 보지 못한 엄마에게 그날 풀어내지 못한  애교가 가득이다.

옷을 갈아입으려 안방 드레스룸으로 가니 화장대 거울에 색종이 편지가 또 있다. 이번엔 글자 대신 그림으로 응석이 가득한 걸 보니 여섯살이 막내의 것이다.

하루치의 피곤이 순식간에 색종이 반의 반만 해진다.

가르쳐준 적도 없건만,

요 방구리만 한 어린이들은 어쩜 이렇게 사람을 행복하게 할까.

색종이에 두세 줄 끄적여 '편지'의 꼴을 갖춘 것을 보며

'유전'이라 생각했다면 좀 과한가? 그래도,

나의 서사 안에서는 진지하게 생각해 볼 만하다 여긴다.



엄마와 아빠 이혼으로 시한 나의 초등 생활은,

입학한 학교와 졸업한 학교가 다르고 그 사이

거쳐 학교가 세 곳 더 있다.

친구 사귀고 관계를 유지할 환경이 아니었으나,

랍게도 나에게는 33년 지기 친구가 있다.

이제는 내 전생을 알고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친구,

ㄱ이다.

일곱 살에 같이 놀았던 기억이 있고, 이후로 내내 물리적 거리가 먼 곳에서 살았는데 어떻게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느냐,

비결은 '편지'다.

나의 글쓰기 시초.

나를 둘러싼 환경 자꾸 변하고 낯선 기분이 가시지 않을 때 편지를 보낼 곳이 있다는 건 정말 큰 위안이 됐다. 그래서 이사를 하면 바뀐 주소부터 얼른 알아다. 롭고 불안한 마음이 들기 전에 어서어서 편지를 써서 내가 여기 있다고 누군가에게 전해야 했다. 이사한 곳으로 답장이 제대로 올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편지하면 ㄱ은 늦지 않게 답장을 해 주곤 했는데, 덕분에 나의 글쓰기는 이어질 수 있었고, 낯선 공간도 적응할만했다. 

어색한 문어체로 안부가 가득한 그 편지들은 아직 간직하고 있. 어찌 버릴 수 있을까.

여하튼 나에게 글쓰기가 몸에 밴 건 그 시절의 편지 덕분데, 이제는 내 아이들이 쓴 손편지에 감동하고 있으니 새삼스럽고 신기한 것이다.

쓰기에의 흥미를 유전으로 보는 과한 생각은 그래서다.

여기에 한가지 더 이유를 더 보태자면.





아빠'글 같은 것'을 발견한 날이 있다.

엄마는 '면접교섭권'이 생소하던 시절이었음에도 방학이면 꼬박꼬박 밀양의 아빠집으로 나를 보냈는데, 그날은

무엇 때문에 서랍장 구석구석을 뒤졌는지 기억나지 않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열심히 뒤져 서랍장 가장 밑칸, 언젠가 내가 쓰다 말았을 공책 한 권군내 나는 옷 더미 아래에서 견했다.

이건 뭐지?

공책 사이에  지폐를 기대하며 후루룩 넘겼지만, 

내가 보게 된 것은 일기라고 해야 할까, 시라고 봐야 할까.

아빠는 술만 먹고사는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아니지, 술 주정뱅이도 글은 쓸 수 있지.

하지만 그 당시로선 꽤나 기심이 동하는 일이었다.

내용은 엄마에게 전하지 못한 화해와 사랑의 말 가득, 한 게 아니라 원망과 저주로 빼곡했다.

엄마가 봐서 좋을 문장은 하나도 없었다.

그렇게 가버리면 좋냐느니, 얼마나 잘 살지 두고 보겠다느니 뭐 그런 내용.

줄쯤, 보고 싶다는 문장이 있었던가.

문장의 존재 여부와 상관없이, 편지 쓰기로 래보다 수준 높은 력을 키워온 나는 일기의 행간에 숨은 후회와 그리움 읽고야 말았다.


짠했다.


끊임없이 술을 마시고 시를 썼던 시인 최승자를 떠올린다.

(아빠를 생각하다 최승자의 시를 생각하다니!)

그의 시는 쓰는 순간의 자신을 견디게 해 주었을 것이고, 생의 이면을 보게 했을 것이.

나는 외로움에 지지 않으려 편지를 썼

아빠는 무엇에 지지 않으려고 글을 썼을까.


너에게 (최승자)


내 목숨밖에는,
목숨밖에 팔 게 없는 세상,
황량한 쇼윈도 같은 나의 창 너머로
비 오고, 바람 불고, 눈 내리고,
나는 치명적이다.

네게, 또 세상에게,
더 이상 팔 게 없다.
내 영혼의 집 쇼윈도는
텅 텅 비어 있다.
텅 텅 비어,
박제된 내 모가지 하나만
죽은 왕의 초상처럼 걸려 있다.

네가 왔으면 좋겠다.
나는 치명적이라고 한다.


계속 썼더라면 아빠도 어느 한 줄쯤엔가

"네가 왔으면 좋겠다"라고 썼을지 모른다.

스스로를 '치명적'이라 표현하기까지 했다면 왠지 좀 웃음이  것 같지만 말이다.

자신이 '시'를 쓸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면,

혹은 쓰게 된 순간부터 계속 쓰는 사람로 남았다면,

리 가족은 다른 모습으로 살기도 했을까.

내 부모의 불화는 그렇게 낭만적인 생각으로 해결될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정하게 된다.

세상은 못 구해도 자기 자신 하나쯤은 구할 수 있는 것이 글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쓰는 동안은 어떤 마음도 견딜 힘이 생기고, 연필심이 닳는 만큼 우리 마음도 덜 뾰족해니까.


이쯤에서 나는  '쓰는 행위'에 흥미는 유전과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을 바꾼다,

DNA 사이사이에 콕콕 박혀 유전된 것은 쩌면

'나 혼자서는 행복할 수 없다'는 마음 한 조각이었 보다.

나와 어린이들은 그 마음을 제때 표현하기 위해 편지를 썼고,

아빠는 너무 늦게 알아챈 나머지 계속 쓸 수 없었다, 읽어주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바라건대 우리에게 우리의 마음 전할 글이 있었더면. 그러나 어쩌면 황송한 이 심정을!
날로 나날이 내 앞에는 자칫 가늘은 길이 이어가라. 나는 나아가리라.한 걸음 , 또 한걸음.




**짧게 덧붙인 시와 제목김소월의 시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대일 땅이 있었더면'을 변형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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