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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정한 시옷 Aug 19. 2024

나는 왜 그렇게 못 키웠을까

프롤로그

아들 둘이 전부일 줄 알았던 내 육아 인생에 딸이 생겼다. 그 딸이 여섯 살이 되도록 꿈인가 생신가 볼을 꼬집어 볼 정도로 행복이 내 것 같지 않다.

(아, 이때 꼬집는 볼은 아이 볼이다. 하하)

딸만 그런가.

에너지 넘치는 아들 둘도 엄마 바라기에 건강한 꾸러기들이라 종교가 없지만 신에게 항상 감사하다.

엄마한테 뽀뽀해 줄 사람? 하면

저요 저요 하고 서로 달려온다.

세상에서 엄마가 제일 좋은 사람? 하면

앉은자리에서 손만 들고 배시시 웃는다.

물론 사랑한다는 애정 표현을 나 또한 많이 한다.

놀이도 많이 함께하는 편이(었)다.

허리가 아프기 전에는, 그래서 거실바닥에 널브러져 앉을 수 있던 때에는 특히 역할놀이에 각종 보드게임 물론이며

한 여름 땡볕에 놀이터 나들이를 동행했다.


워킹맘이지만 아이들에게 그만큼의 애정을 쏟을 여유가 있는 까닭은 내가 가진 아주 큰 복 중의 하나, 친정엄마 살림을 도맡아 해 주시는 덕분이다. 

여느 날처럼 퇴근 후 아이들과 뒹굴고 있는 나에게 엄마가 문득 혼잣말처럼 말했다.

나는 왜 우리 딸을 그렇게 못 놀아줬을까.
맨날 혼자 놔두고 다녔을까.


나는 남편과 친정엄마와 함께 육아하지만,

엄마는 혼자서 나를 키웠다.

아빠는 그 시절 많은 아빠들이 그랬듯, 육아와 살림뿐 아니라 가정경제까지도 무심했고 가정폭력을 소통의 도구로 삼는 사람이었다. 이혼 뒤 혼자 딸을 키우던 엄마는 중풍으로 쓰러진 외할머니를 오랜 세월 간호했다. 다른 형제들이 넷이나 됨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도움 주지 않았으므로(심지어 엄마에게 손을 벌리기도!) 작고 허름한 주점에서 물장사로 돈을 벌었다.

새벽에 쪽잠을 고, 낮엔 80킬로가 넘는 외할의 똥오줌 과의 사투인지, 쏟아지는 잠과의 사투인지 구분할 수 없게 고단했다.

나의 초등학교 시절이 그렇게 흘렀다.


엄마는 나의 어린 시절을 함께 해 주지 못했다. 방치에 가까운 육아였다고 해도 그럴 수밖에 없는 시절이었다.

아무도 엄마를 비난할 수 없지만,

엄마는 이제 와 그 시간이 후회되고 원망스럽다.

누구를 원망해얄 지 몰라 가끔 나에게 쏟아붓기도 한다.

그럴 때 나는 누구를 원망해야 하지?

그 시절의 어린 나 역시 힘들지 않았겠냔 말이다.

답이 안 나왔다.

그런 때일수록 더 열심히 아이들을 사랑했다.

그런 내가 엄마는 또 부러웠을 것다.


지나간 일은 지나간 대로 받아들이는 법이 엄마와 나에게 필요하다. 엄마가 더 나이 들어 내 옆에서 사라지기 전에.

이 이야기를 시작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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