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FIFA 캐나다 여자월드컵을 앞두고 다음 뉴스펀딩에 게재한 글.
히로미는 도쿄에서 태어났다. 어린 히로미는 한 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소녀였다. 아빠의 조기축구회에 따라다녔고, 집 안에서도 공을 차다 엄마께 꾸지람을 들었다. 히로미는 하고 싶은 건 꼭 해야 하는 아이였다.
히로미는 9살이 되던 해, 그토록 원하던 유소년축구클럽에 들어갔고, 일요일이면 남자아이들과 어울려 신나게 축구를 했다. 클럽의 이름은 ‘무궁화주니어’다.
오오므라 히로미. 강.유.미. 재일교포 3세.
‘무궁화주니어’는 재일교포 어린이들로 이뤄진 유소년축구클럽이었다. 강유미는 9살 때부터 대한민국의 국화(國花)인 무궁화를 가슴에 달고 축구를 했다. 일반 학교에서 일본인 친구들과 함께 생활을 했고, 할 줄 아는 한국말이라곤 ‘안녕하세요’, ‘고맙습니다’ 정도였지만, 강유미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대한민국이 있었다.
“대한민국 국가대표가 되고 싶었어요. 당연히. 한국인이니까요.”
강유미의 목표는 한결같았다. 한국에서 축구를 하고, 한국에서 국가대표팀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중학생이 돼 일본인 여자선수들로 이뤄진 축구클럽 ‘사쿠라걸스’에 들어갔을 때도 목표는 변함이 없었다. 월드컵, 올림픽 등 국가대항전을 볼 때면 태극마크를 달고 그라운드를 누비는 자신을 상상했다.
사실 한국의 여자축구 저변은 일본에 비해 좋지 않았다. 한국의 여자축구 등록팀은 초등 23개, 중등 20개, 고등 17개, 대학 9개, 실업 9개에 불과하다. 80개가 채 안 되는 규모에 등록선수는 1700명을 간신히 넘는다. 반면 일본은 등록 팀 수만 1409팀이며 등록 선수는 3만 명이 훌쩍 넘는다.
하지만 17살이 되던 해, 강유미는 한국행을 택했다. 환경보다는 꿈을 생각했다. 한국에서 축구를 하고 싶었고, 한국 선수들과 경쟁해 한국 대표팀에 들어가고 싶었다. 부모님의 품을 떠나 아는 이 하나 없는 한국땅에서 꿈을 이루기 위한 도전을 시작한 것이다. 강유미는 재일교포단체의 추천을 받아 여자축구 명문인 동산정보산업고등학교에 입학했다. 한 학년 위에는 지소연이 뛰고 있었다. 히로미는 그렇게 한국에 왔고, 강유미라는 한국 이름으로 불리게 됐다.
어린 나이에 부모님이 계신 집을 떠나 숙소 생활을 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즐거운 마음으로 한국행을 택했지만 가족과 집이 그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어머니는 음식점을 운영하시고, 아버지는 택시를 운전하시기 때문에 부모님이 한국에 자주 올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강유미는 전화 통화로 그리움을 달랬다.
한국에 오기 전 한글 공부를 열심히 했지만 말은 여전히 어눌했다. 통역이 있을 리 만무했고, 당시 감독은 훈련 때마다 손에 사전을 들고 있어야 했다.
“3개월쯤 되니까 한국말이 잘 들리기 시작하더라고요. 친구들이랑 이야기를 많이 하려고 노력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한국말을 익히게 된 것 같아요. 처음에는 한국말 때문에 실수도 많이 했죠. 어디서 주워들은 말을 툭 내뱉었는데 알고 보니 심한 욕이라는 거예요. 언니들한테 많이 혼났어요(웃음).”
일본과는 사뭇 다른 한국 문화에 대한 적응도 필요했다. 강유미는 한국과 일본의 가장 다른 점이 사람들의 성격이라고 했다. 매사 조심스러운 일본인에 비해 한국인은 “기가 세다”며 웃었다. 축구부의 분위기도 달랐다. 지도 방식에도 차이가 있었고 운동부의 깍듯한 선후배 관계 역시 익숙지 않은 풍경이었다.
일본은 클럽축구 문화가 발달돼 있었다. 일반 학생들과 똑같이 학교 생활을 하고 방과 후나 주말에 모여 축구를 하는 방식이었다. 훈련을 할 때도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축구를 즐겼다. 한국에 와서 처음 맛본 학원축구는 훈련양도 많고 강도도 셌다.
“일본은 자유롭게 풀어주는 분위기였어요. 한국에서는 하나하나 자세히 가르쳐 주시더라고요. 이럴 땐 이렇게 해야 한다. 저럴 땐 저렇게 해야 한다. 그런 것들이요. 혼 나는 일도 많아지고요(웃음). 처음에는 좀 무서웠는데 그것도 적응이 되더라고요. 혼나면서 많이 배우기도 했고요.”
점차 한국에 적응하며 꿈을 키워가고 있던 강유미는 2008년 10월, U-19 대표팀에 선발됐다. 성인 대표팀으로 가는 발판이었다. 강유미는 태극마크를 달고 2008 AFC U-19 여자챔피언십 예선에 참가했다. 강유미는 4경기에 출전해 5골을 넣었지만 만족할 수 없었다. 상대가 필리핀, 싱가포르, 미얀마 등 약체였기 때문이다.
강유미는 선배 지소연을 쫓았다. 같은 공격수로서 1년 차이지만 배울 점이 많은 선배였다. “소연 언니는 정말 최고인 것 같아요. 제가 한양여대에 간 것도 사실 소연언니 때문이었어요. 같이 훈련하고 경기하면서 많이 배우려고 따라갔어요. 드리블이나 볼 터치 같은 것들을 보고 배우고 싶었어요.”
2010년 한양여대에 진학한 강유미는 지소연과 함께 2010 FIFA U-20 여자월드컵에 참가하게 된다. 지소연처럼 많은 경기에 뛰지는 못했지만 처음 경험해 본 세계 대회는 강유미에게 좋은 경험이었다. 당시 한국은 독일과 나이지리아에 이어 3위를 차지하며 여자축구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시련도 있었다. 2011년 말 열린 WK리그 드래프트에서 충남일화의 지명을 받아 입단했지만 1년 만에 팀이 해체된 것이다. 해체된 팀의 선수들은 별도의 드래프트를 통해 다른 팀들로 뿔뿔이 흩어졌다. 강유미는 고등학교 은사인 최인철 감독의 부름을 받아 인천현대제철의 유니폼을 입었다.
“인천현대제철에서 있던 2년은 배움의 시간이었어요. 처음부터 그렇게 마음을 먹고 들어갔어요. 워낙 잘하는 언니들도 많이 있었고요. 경기에 많이 나가진 못했지만 감독님과 언니들한테 많이 보고 배웠죠.”
강유미는 인천현대제철에서 뛴 2년 동안 45경기에 출전해 10득점을 기록했다. 이번 2015시즌을 앞두고 강유미는 화천KSPO로 이적했다. 그리고 현재 8경기에서 5골을 넣어 득점 2위에 올라있다. 팀을 옮긴 후 물 만난 고기가 됐다. 강유미는 “그 정도는 아니에요”라며 쑥스러워했지만 WK리그에서의 뛰어난 활약은 그 이상의 결과를 몰고 왔다.
지난 3월 25일, 대한민국여자축구국가대표팀은 러시아와의 친선 2연전을 위한 23명의 선수 명단을 발표했다. 명단에는 강유미의 이름 석자가 당당히 자리했다. 소속팀에서 소식을 들은 강유미는 믿을 수 없었다. 홀로 한국에 온 지 8년 만에 꿈이 이루어졌다.
“늘 ‘언젠간 대표팀이 돼야지’라고 생각했지만, 멀게만 느껴졌어요. 믿기지 않았고 눈물이 날 것 같았죠. 엄마께 전화로 말씀드리니 대신 울어주셨어요. 너무 기쁘고 자랑스럽다고요. 일 하시다가도 문득문득 생각나면 감격스러워서 우신대요.”
4월 5일과 8일 열린 친선경기에서 강유미는 대한민국 국가대표가 돼 그라운드를 누볐다. 어린 시절의 꿈은 현실이 됐다. 오른쪽 측면 공격수로 출전한 강유미는 자신의 A매치 데뷔전에서 빠른 발과 드리블 실력을 선보이며 존재감을 뽐냈다. 비록 일본에 계신 부모님은 볼 수 없는 경기였지만 강유미에게는 무척이나 벅찬 순간이었다.
“기뻤고 그만큼 긴장도 됐어요. 부족함을 많이 느끼기도 했고요. 그렇게 잘한 것 같지 않아요. 러시아 선수들이랑 부딪히면서 몸을 키워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체력도 더 늘려야 해요.”
강유미는 4월 30일 발표된 2015 FIFA 캐나다 여자월드컵 대비 국내 소집훈련 명단에도 이름을 올렸다. 26명 중 23명이 6월의 캐나다를 만나게 된다. 강유미는 A매치 데뷔전 기념으로 대한축구협회 페넌트를 숙소 방 안에 걸어 놓고 월드컵에 대한 꿈을 키워가고 있다.
“저는 이제 시작인 것 같아요. 작년에 멘토링 수업을 받았는데 목표가 있으면 구체적으로 적어놓아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올해는 WK리그 득점 2위 이상을 차지하는 게 목표예요. 월드컵에 나가는 것도 제 오랜 목표고, 월드컵을 통해서 해외 진출을 하는 것도 꿈이에요. 프랑스나 스페인 같은 유럽이요. 소연언니가 있는 영국도 좋고요. 발롱도르 수상도 적어놨어요(웃음).”
말하는 대로, 바라는 대로 이뤄진다. 강유미는 그 명제를 증명해 가는 중이다. 축구를 좋아하던 자이니치 소녀 히로미가 대한민국 국가대표 축구선수 강유미가 되기까지, 긍정의 힘과 노력의 결실이 있었다. 월드컵 무대를 누비는 그녀를 그려본다. 강유미의 말 대로 ‘이제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