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FIFA 캐나다 여자월드컵을 앞두고 다음 뉴스펀딩에 게재한 글.
“저는 좀 미친 것 같아요.”
귀여운 얼굴로 시원시원한 말들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한국 여자축구의 대표적인 테크니션 전가을은 매 인터뷰마다 당차고 톡톡 튀는 대답으로 듣는 이들을 즐겁게 했다. 지난해 2014 인천 아시안게임 때는 체력 훈련이 굉장히 힘들어서 “메달 못 따면 열받을 것 같다”고 했고, 그 해 12월 홍명보 자선경기에 참가했을 때는 “월드컵에서 일 한 번 내고 싶다”며 웃었다. 직접 만나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눈 전가을은 역시 명언 제조기였다. 솔직하고 담백했고 자신의 인생에 대한 신념이 뚜렷한, 속이 꽉 찬 사람이었다.
전가을은 ‘축구에 미친 여자’다. 초등학교 5학년 때 팔꿈치 부상으로 탁구선수 생활을 못하게 되자 발을 쓰는 축구를 했고, 그때부터 축구는 인생의 전부가 됐다.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뭐든지 미쳐야 할 수 있는 거 아닐까요?”
본래 한 번 시작한 일은 끝장을 봐야 하는 성격이다. 그렇지 않으면 시작도 하지 않았을 거라고 말한다. 전가을은 자칭, 타칭 축구에 미쳐 있는 사람이다. 축구 이외의 흥미를 묻자 약 10초 간의 고민 끝에 ‘혼자 음악 들으면서 쉬는 것’이라는 대답을 했다.
“어제 후배가 그랬어요. ‘언니, 언니는 정말 축구가 전부인 사람 같아요.’ 그 말 듣는데 좋더라고요. 제가 주변 사람들한테 그렇게 비친다는 게요. 제가 억지로 ‘난 축구가 전부야’라고 말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그렇게 보고 있다는 거잖아요. 아, 내가 잘하고 있구나. 즐기면서 열심히 하고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서 좋았어요.”
전가을이 축구에 미쳐있는 이유? 단순하다. 축구가 재미있기 때문이다. 초등학생 시절, 운동을 좋아하시는 아버지의 조기축구회를 따라다니다 축구에 맛을 들렸고, 탁구를 그만둔 뒤 동네 남자아이들과 어울려 축구를 했다. 그러던 중 파주시에서 열린 여성 5인제 축구 대회에 나가 우승과 MVP를 휩쓸었고, 이때 오산여중 여자축구부 감독의 눈에 띄어 본격적으로 축구를 시작했다.
“그땐 제가 잘하는 건지 뭔지도 몰랐어요. 그냥 재미있어서 했으니까요. 부모님이 나란히 앉으셔서 저를 앞에 앉혀놓으시고 축구선수로의 진로에 대해 제 의견을 물으실 때도 저는 심각성을 몰랐어요. 축구가 좋으니까, 무조건 축구부로 가겠다고 떼를 썼죠.”
그렇게 축구를 시작한 지 14년이 훌쩍 넘었다. 전가을은 국가대표팀과 WK리그를 오가며 한국 여자축구를 대표하는 선수로 성장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축구를 하면서 느끼는 즐거움과 재미는 축구선수 생활을 이어가는 가장 큰 동력이다.
“즐겁지 않으면 왜 하나요? 재미가 없으면 어떻게 해요? 먹고살려고 한다고 현실적으로 말하는 사람들도 있죠. 재미가 밥 먹여주냐고. 근데 제 일이 재미없으면 안 되잖아요. 저는 만약 재미가 없다고 느껴지면 미련 없이 그만할 것 같아요. 지금 제 전부인 이 축구도요.”
전가을은 최근 부상에서 복귀했다. 지난 1월 2015 중국 4개국 친선대회에 참가한 이후 3개월 넘게 쉬었다. 장경인대 부상이었다. 허벅지 바깥쪽을 따라 연결된 긴 인대인 장경인대에 오랜 시간 무리가 가해져 무릎 바깥쪽에 염증으로 인한 통증이 생긴 것이다. 전가을은 걷지도 못할 만큼 통증이 심해져 3월 2015 키프러스컵에 차출됐지만 모든 경기를 지켜봐야만 했다.
“장경인대 전문가가 다됐어요(웃음). 인터넷 찾아보면서 공부했다니까요. 마라톤이나 사이클, 등산 같은 운동을 하면 많이 나타난대요. 쉽게 말해서 제가 그동안 달린 만큼 쉬어야 된다고 그러더라고요. 사례들을 보니까 기본 6개월은 쉬더라고요. 3년까지 가는 사람도 있고요. 장기적으로 봐야 하는 질환인데, 그렇게 생각하면 저는 좀 놀랍죠. 티는 못 냈는데 저는 정말 축구 못하게 되는 줄 알았어요. 그 정도로 아프고 안 나으니까요. 짜증도 나고 신경도 예민해졌었어요.”
얼마나 답답하고 조급했을까? 전가을은 답답한 마음에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몰래 운동장에 나가 힘껏 뛰어보기도 했다. 한 바퀴도 못 뛰어 통증으로 주저앉아 좌절했고, 다시 뛰기를 반복했다. 3년째 연초마다 이어진 장기 부상이었다. 2013년에는 발등 골절, 2014년에는 근육파열로 전반기를 쉬어야 했다. 전가을은 자신의 회복을 위해 애써주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부상을 떨쳐내기 위해 노력했다. A매치 기간이었던 2주 동안 재활 센터에서 운동에 매진했다.
“내가 안 나으면 죄짓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트레이너 선생님부터 해서 정말 많은 분들이 도와주시고 걱정해 주셨으니까요. 저도 더 노력할 수밖에 없었어요. 약도 꼬박꼬박 챙겨 먹고, 밤낮으로 마사지하고, 보강 운동도 열심히 하고요. 정성이 모여서 빨리 나을 수 있던 것 같아요. 감사해야 할 분들이 정말 많아요.”
2015 FIFA 캐나다 여자월드컵이 코 앞으로 다가온 상황에서 당한 부상은 전가을 개인에게나 대표팀에나 가슴 철렁한 일이었다. 하지만 전가을은 이번 부상이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믿고 있었다. 본인에게는 새로운 마음과 몸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시기였고, 대표팀에게는 새로운 선수들을 시험하고 경쟁 구도를 넓힐 수 있는 기회였다는 것이다. 지난 4월 5일과 8일 열린 러시아와의 친선경기에는 부상 선수 대신 황보람, 이은미, 김수연, 손윤희, 강유미 등이 새롭게 대표팀에 합류해 경기를 뛰었다.
“17년 만에 국내에서 열린 A매치인데 당연히 아쉽고 씁쓸했죠. 제 욕심만 차리면 안 아프다고 우겨서 어떻게든 들어가고 싶었지만, 그때 쉰 게 오히려 좋은 점도 있다고 생각해요. 이번에 새로운 선수들도 많이 선보일 수 있었잖아요. 더 많은 여자 선수들이 알려지고, 다른 WK리그 선수들도 대표팀에 들어올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됐을 테니까요.”
멀리 보고, 크게 볼 줄 아는 전가을이다. 전가을은 3년간 이어져온 부상이 시련만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부상을 통해 배우고 얻은 것이 그만큼 많기 때문이다. 운동선수라면 늘 지고 다닐 수밖에 없는 부상이라는 등짐이 전가을에게는 정신적인 성장을 가져다준 선물이었다.
2011년 인천현대제철로 이적한 뒤 찾아온 슬럼프를 극복한 계기도 부상이었다. WK리그 출범 원년인 2009년 수원시설관리공단에서 데뷔한 전가을은 2010년, 최고의 한 해를 누렸다. 수원은 WK리그 우승을 했고, 국가대표팀에서는 광저우 아시안게임 동메달, 피스퀸컵 우승의 쾌거를 올렸다. 개인으로서는 WK리그와 피스퀸컵 MVP, 대한축구협회 최우수 선수상을 수상했다. 최고의 자리에서 팀을 옮겼지만 마주친 환경은 예상과 달랐다.
“자만했던 것 같아요. 2010년에 제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잘 되다 보니까 스스로 좀 젖어있었던 거죠. 환영받아서 새 팀에 왔다고 생각했는데 모든 부분이 저한테 맞춰져 있지 않잖아요. 저는 이적 선수일 뿐이고, 막내였고요. 적응이 어려웠던 거죠. 그렇다고 수원에 있을 때보다 더 열심히 했던 것도 아니고. 그때는 내가 잘하니까 우승했고 상 탔다고 생각했어요. 지나 보니까 그건 그동안의 노력에 대한 보상이더라고요. 그러면 또 노력해야 보상이 올 텐데 노력을 안 하고 그냥 거기에 안주하고 있었던 거예요. 제 스스로에게 관대해진 거예요. 남 탓 하고, 환경 탓하고…… 3년 동안은 힘들다고 징징거리기만 했던 것 같아요.”
이런 와중에 당한 부상은 그저 부상이 아니었다. 전가을은 재작년부터 올해까지 연이어 당한 부상으로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고 말했다.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더 많은 것을 느끼게 하기 위해 하늘에서 부상이라는 것을 준 것 같다는 것이다.
“전 그래요. 부상이라는 게요. 이렇게 말하면 좀 그런가? 한 번씩 당해보는 거도 나쁘지 않은 거 같아요. 부상으로 느끼는 점이 많아요. 부상을 당하면 선수로서 당장은 마이너스잖아요. 근데 축구선수로서나 인간적으로나 성숙해지는 거 같아요. 부상을 당해서 선수단 밖에 나와있으면 보이는 시야가 넓어져요. 그동안 못 봤던 부분도 많이 느끼게 되고요. 경기를 못 뛰는 선수들의 마음, 감독님의 마음, 스태프들의 마음도 느끼게 되고요. 다른 사람의 입장도 이해할 수 있을 거 같고. 안에 있으면 잘 모르거든요.”
포기로 이어질 수도 있는 부상이 전가을에게는 오히려 자극제가 됐다. 전가을은 축구에 더욱 미쳤다. 지난해 아시안게임을 준비하면서도 전가을의 몸 상태는 온전치 않았다. 전가을은 부상을 극복하기 위해 애썼다. 남들이 훈련할 때 쉬었던 만큼 두 배, 세 배로 노력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전가을은 자기 전 복근운동을 300개씩 하며 몸과 체력을 단련했다. 누가 알아봐 주길 원해서가 아니라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소속팀의 최인철 감독이 “너 헬스트레이너 할 거냐?”라며 말릴 정도였다.
“키프러스컵 같은 국제대회에서 유럽 선수들을 접하면서 몸을 키워야 한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월드컵 나가면 더 강한 애들이 나오잖아요. 어떻게 월드컵 나가는 건데 거기서 얻어맞고만 오면 되겠어요? 한방이라도 때리고 와야죠.”
12년 만의 월드컵 출전을 앞에 둔 국가대표팀이 당면한 과제. 체격 차가 큰 유럽 선수들을 상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승부욕 강한 전가을이 더욱 전의를 불태우는 부분이다. 체격과 힘의 차이는 분명하지만 결국 똑같은 여자들의 싸움이라는 게 전가을의 설명이다.
“지난번에 키프러스컵 갔을 때 웨이트장에서 한 네덜란드 선수가 턱걸이를 막 남자처럼 으쌰으쌰 하는 거예요. 충격받아서 그 친구가 나가고 나서 저도 해봤거든요. 안 되는 거예요! 화가 나더라고요. 아무리 타고난 게 다르다고 해도 똑같은 여자잖아요. 걔네 남자 아니잖아요. 지기 싫어요. 웨이트 운동 더 열심히 할 거예요. 주눅 들고 싶지 않고 그럴 필요도 없어요.”
전가을은 30일 발표된 캐나다 여자월드컵 최종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노력으로 빠른 시간에 부상을 극복한 덕분이다. 전가을은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합류할 대표팀에 설렘을 가득 품고 있었다.
“다시 시작하기 딱 좋은 상태예요. 지금 이런 몸 상태와 마음가짐으로 월드컵을 준비할 수 있어서 좋아요. 그동안 못 보여준 게 많아요. 월드컵 가서 정말 다 보여주고 싶어요.”
전가을은 한 달 앞으로 다가온 월드컵을 준비하는 방법으로 현재에 충실함을 꼽았다. 월드컵에 대한 목표와 꿈은 마음속에 새겨둔 채로 지금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다는 것이다. 현재에 충실하며 당장 해야 하는 일을 착실하게 하다 보면 월드컵에 나가서 굳이 마음을 다잡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잘할 수 있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축구는 진짜 어떻게 될지 몰라요. 우리가 브라질을 이길 수 있어요. 현실적으로 보면 확률은 낮지만 축구는 확률로 하는 스포츠가 아니잖아요. 확률 싸움이 아니라 그동안 어느 팀이, 누가 더 준비를 잘해왔는지, 그날의 컨디션, 심리 상태 등이 복합적으로 다 맞아떨어져야 이야기가 되는 거죠. 브라질 애들도 여자잖아요. 부딪혀봐야죠. 한 경기, 한 경기 최선 다하다 보면 16강, 8강도 진출할 수 있는 거고요. 2002년 남자월드컵 때 4강 갈 줄 누가 알았겠어요? 여자축구도 좋은 모습 보여드리면 거리응원도 생길 수 있지 않을까요? 저는 그걸 꿈꾸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