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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과 Jun 06. 2022

36세, 첫 모임에 나갔을 때 느끼는 것들

나이가 다 무슨 소용이겠냐만은

 06학번이고 법을 전공했다. 대학에 처음 갔을 때 대부분이 새롭고 신기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새롭게 다가온 것은 학번이다. 살면서 지녀본 적이 없는 숫자인데 그게 또 금방 익숙해진다. 그리고 자연스레 주변을 파악한다. 06이었으니까 한 학년 선배인 05는 이곳저곳에서 불쑥불쑥 나타나고 04, 03은 어째 잘 안 보이고 (남자의 경우 보통 군대에 있다) 02... 부터는 좀 낯설다. 함부로 말을 걸면 안 될 것 같고 그들이 말을 걸어오면 부담스럽다. 그런데 어느 날 과방에 갔는데 99학번이 있는 것이다. 아무리 법대여서 고학번 선배가 캠퍼스에 많다고 듣긴 했건만 99라니. 내가 초등학교 6학년이 되었을 때 저 사람은 이미 여기서 소주를 한 잔 걸치고 있었다는 뜻이다. 0의 세계에 익숙해져 버린 나는 앞자리가 9인 선배를 보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99학번이 어떻게 여기서 같이 이러고 있는 거야 ㅋ


그랬던 내가 지금은 11학번, 14학번 등과 함께 감자 농사를 짓는다고 앉아있다... 대학 시절 1의 세계를 품었던 그들에게 나는 어떤 모습일까. 내가 99학번 선배를 봤을 때의 감정과 비슷한 것을 느낄까. 물론 내가 스무 살이었던 2006년과 2022년은 또 엄연히 다른 시대며, 여기는 법학부 과방도 아니니 부디 지금의 20대가 당시의 나처럼 좁고 편협하며 단조로운 시각을 지니지 않았기를 바랄 뿐이다. 아무쪼록 06년도 당시 시험공부에 매진하던 99학번 태열이형에게 미안할 따름이다.   


아무튼 이 글은 모임에 나가면 어느새 꽤 연장자가 되어버린 나 자신을 되돌아보며 요즘 모임을 하는데 나이가 다 무슨 소용이며 이제 20대나 40대나 별반 다를 게 없다는 글을 써보려 한 것인데 갑자기 2006년도 대학교 과방에 앉아있던 태열이형의 모습이 떠올라 이렇게 주절주절 쓰게 됐다.


감자칲스 멤버는 총 9명. 나이도 직업도 다양했다. 대기업 직장인, 스타트업 직장인, 대학원생, 심지어 대학생도 있었다. 아무래도 아직 20대들과의 다양한 선을 가지고 있는 휘영이가 모임의 주축이 되다 보니 학부생과도 교류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감자칲스 9명 중에는 치과의사도 한 분 있었는데 역시 바빠서 오지 못했다고 한다. 대신 미안한 마음을 담아 나머지 8명이 다 먹어도 없어지지 않을 감자튀김을 사 보냈다. 참여자 중 치과의사가 있다고 했을 때 나는 자연스럽게 그와 함께 감자 요리를 앞에 두고 술잔을 기울이며 요즘 치과업계는 어떻습니까? 개원은 하셨는지요? 그래서 다음 스케일링 서비스는 언제 받으러 가면 될까요? 우아하게 이런 얘기를 나누는 모습을 상상했는데 그는 없고 그가 보낸 감자튀김만 산처럼 쌓여있었다. 왠지 앞으로도 계속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여느 모임이 그렇듯 우리는 자기소개를 하고 각자 왜 감자를 심고 싶었는지 간단하게 밝히고 앞으로의 계획을 짰다. 차이가 있다면 감자칲스의 첫 모임을 기념하기 위해 모든 음식을 감자 요리로 준비했다는 것이었다. 치과 선생님의 협찬인 감자튀김을 비롯해 감자전, 웨지감자, 감자칩, 감자 캐비어 요리까지 있었는데 대부분 감자를 기름에 튀긴 요리여서 얼마 먹지 못하고 전부 물려버렸다.

 

 또 하나는 각자 맡은 롤에 따라 별도의 네이밍을 한 것인데 여기선 우리 모두가 씨레벨 (C-level)이다 는 의미를 부여해 모두 C가 들어간 직함을 갖기로 했다. 가령 나는 브런치에 감자 일기를 쓰겠다고 했으니 Chief Brunch Officer, CBO가 된 것이다. 이 부분에서 나는 어엿한 30대 중반으로서 약간의 항마력 테스트를 당하는 기분이 들어 브런치에서는 통편집각이다, 왜냐면 어차피 이런 건 지어놓고 실제로는 잘 쓰지도 않아 한 달 내 사장될 것이기 때문에,라고 홀로 생각했었는데 의외로 계속 쓰고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여기에도 쓰게 됐다. 30대 중반이 되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많아질 줄 알았는데 물론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자꾸 줄어드는 느낌이다.




     


   


2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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