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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과 May 22. 2022

파이어가 아닌 파밍을 선택해버렸다

감자 농사 이야기다


때로는 우연의 일치같지만 결국 다 우리의 선택이다.

예전에 한창 SNS에 돌아다녔던 인생 교훈들 중에 '갈까 말까 할 때는 가고, 살까 말까 고민될 때는 사지 말고~' 이런 레퍼토리의 문장들이 있다. 공감이 되는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지만 내 기준에서 내가 믿고 있는 원칙이 하나 있다. 갈까 말까 할 때는 간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모여있는 어떤 자리에 갈지 말지 고민이 될 때는 간다를 선택한다는 것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게 더 나은 선택이다.

 

가지 않았을 때보다 갔을 때 더 즐거운 일이 많이 일어났고 결과적으로 삶은 더 풍성해졌다. 아 왠지 거기 가면 좀 피곤할 것 같은데, 근데 또 가면 재밌을 것 같고... 싶을 때는 가는 것이다. 물론 참여하지 않고 그냥 집으로 갔을 경우의 수를 일일이 겪어본 건 아니지만 집에 머물렀을 때는 그냥 누워있거나, 티비를 보거나 아니면 누워서 티비를 보거나 보통 크게 이 세 가지에서 벗어나지 않는 나를 발견하면서부터 이런 원칙을 세웠다. 마음으로는 집에 가면 방청소도 하고 운동도 하고 책 읽고 글도 쓰면서 멋진 저녁을 마무리해야지ㅎ 라고 생각하지만 애초에 피곤하다며 집에 간 사람의 저녁이 그렇게 탄탄대로일리는 없다.


그날은 일요일이었음에도 사람들로 인한 빡침이 겹겹이 쌓여가는 날이었다. 오후 7시, 하루 일과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 전부 끝났을 때는 정서적으로 완전히 소모되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나는 본능적으로 이대로 집에 들어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적절한 타이밍에 마침 오늘 기훈이네 변호사 사무실 개업을 기념하는 작은 모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5명 정도 되는 모임원들을 살펴보니 모두 성품이 어질고 무엇보다 나보다 연배가 어린 사람들만 있었다. 동물적으로 여기에 가면 아무 말이나 지껄여도 되겠다는 생각이 스쳤고 바로 가기로 결심했다. '갈까 말까 할 때는, 간다!"같은 원칙은 한번 생각해본 적도 없다. 원칙에 따라 행동한다는 건 대쪽판사 이회창 씨에게나 어울리는 말이지 사실 나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심지어 당시엔 사람들과의 만남이 너무 질려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내적 자아를 튼튼하게 하는 시간 (표현은 참 그럴싸하다)을 갖자고 생각하던 차였는데 계획도 없던 모임에 내가 스스로 청해서 가게 됐다.


강남에 위치한 변호사 사무실 개업 모임이었기 때문에 출장 뷔페라도 와있을 줄 알았지만 식탁엔 닭강정과 감자튀김이 차려져 있었다. 물론 이날은 마음이 허기를 채우려 온 자리였기에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저 서로의 푸념을 늘어놓고 들어주고 그렇게 건강하지만 발전은 없는 수다를 재미나게 털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런데 그 대화의 막바지에 어찌어찌하다 감자 농사에 대한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휘영이가 자신의 을지로 옥탑방에 (휘영이는 작업실이라고 부른다) 감자를 키우기로 했다는 것이다.   


거기서 감자를 키운다고? 그 옥탑방은 내가 2년 간 살다가 작년 여름 휘영이에게 양도한 곳이다. 그 건물엔 엘리베이터가 없다. 그리고 옥탑은 5층이다. 감자 농사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흙과 화분을 들고 계단을 올라가는 내 모습이 상상됐다. 옥외 공간이 꽤 넓어서 다 채우려면 흙도 많이 있어야 된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끌렸다. 옥탑에서 2년 넘게 살면서 재미있는 프로젝트 하나 못해본 채 에어비앤비만 하다가 끝냈다는 건 늘 마음속의 미련으로 남아 있었다. 다달이 월세 이상의 돈을 벌며 통장 잔고를 조금이나마 늘렸지만 그래서 그 돈은 지금 다 어디에 있을까? 주식에 들어가 있다...  그때의 경험과 늘어난 잔고가 의미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돈이 없었다고 해서 지금의 삶이 크게 달라져 있을지는 모르겠다.

선자
선자 : 내가 선택한기다. 말만 하면 시상 다 준다카는 거, 내가 싫다 한 기라.
솔로몬 : 왜 싫다고 하셨어요.
선자 : 내를 반으로 쪼개 놓고 살 수는 없다 아이가. 뭐는 당당히 내놓고, 뭐는 숨기가 살고.
솔로몬 : ...
선자 : 니 그 아나? 잘 사는 것보다 우떻게 잘살게 됐는가 그기 더 중한 거라.

                                                                                                               파칭코 6화 中  


선자의 선택은 그녀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놨다. 안락하지만 떳떳하지 못한 삶을 뒤로하고 오사카로 떠났던 선자의 선택을 감자 농사에 비유하는 건 무리수라고 여길 수도 있지만 돈이 되지 않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고생 길이 훤한 옥탑방 감자 농사를 짓기로 했다는 것은 넓은 의미에서 크게 다를 게 없다. 매일 우리가 하는 작은 선택들이 인생을 결정짓진 않겠지만 결국엔 그것들이 모여서 하나의 방향을 결정한다. 감자 일기를 쓰면서 감자가 아닌 드라마 파친코의 이야기를 하게 된 것도 모두 내 선택이다. 다음엔 글에 감자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담아보도록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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