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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과 May 22. 2022

우리는 감자를 키우기로 했다

을지로 옥탑방에서

우리는 감자를 키우기로 했다. 내가 아니고 우리인 이유는 함께 키우는 사람이 9명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감자를 키우기로 한 곳은 중구 초동 62번지, 을지로 3가 한복판에 위치한 작은 건물의 옥탑방이다. 건장한 청년들이 밀짚모자를 쓰고 뙤약볕 아래서 밭을 일구는 그런 귀농 라이프도 아니며 도심에서의 스트레스를 벗고자 주말마다 교외로 나가 텃밭을 가꾸는 주말 농장 체험도 아님을 미리 밝힌다.


을지로 옥탑방의 주인이자 (물론 세입자다) 광화문으로 출퇴근하는 직장인인 휘영이가 이 아이디어를 처음 냈다.


 지난달 청천벽력 같은 뉴스를 하나 접했습니다. 기후 변화에 따른 이상 고온현상과 팬데믹으로 인한 고용 불안정으로 미국 감자 작황이 원활하지 않아 오리온 포카칩의 발주가 중단되었다는 소식이요.
 4차 산업을 논하며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 알쏭달쏭 인터넷 세상이라지만, 당장 몇십 년 후엔 오늘 내가 먹어야 할 먹거리를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해지는 세상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시 말해 먹고 살 걱정을 나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 정도는 갖출 줄 알아야겠다는 생각인 거죠. 그래서 일단은, 제가 좋아라 하는 구황작물부터 키워봐야겠다는 의지를 다졌습니다.  
                                                                                                                    @teamcobb.co


휘영이는 땅에 떨어진 돌에도 지구적 의미부여를 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는 이것 외에도 대충 5-6가지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데 대부분 돈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꾸준히 프로젝트를 밀어붙여 옥탑방에 불과했던 공간을 진짜 작업실로 만들어냈다. 누군가는 그를 MZ세대의 바로미터라고 불렀다. 내 경우 지난해 대학내일에서 진행한 MZ 트렌드 능력고사에서 거의 0점에 가까운 성적을 기록했으며 (이런 시험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에 만족하고 있다) 웬만하면 이제 결과물이 확실하지 않은 일은 잘 안 하려고 하던 차였다. 그럼에도 내가 이 프로젝트를 함께 하기로 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사실 나는 이 옥탑방의 전 세입자다. 작년 여름 휘영이에게 양도하긴 했지만 아직 여러 면에서 공간에 미련이 남아있다. 헤어졌지만 홀로 질척이는 남자 친구의 마음이랄까. 내가 더 잘했어야 했는데...  
2. 무언가 새로운 활력이 필요했다. 새로운 사람들, 새로운 노동.

3. 원래 감자를 좋아한다. 정말이다.


휘영이는 MZ의 바로미터라는 수식에 걸맞게 자신의 인스타그램을 통해 사람들을 모집했다. sns에 취약한 나는 이런 모집이 있는 줄도 몰랐다가 우연히 주말에 참석한 술자리에서 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모집 기한이 지났지만 나는 주섬 주섬 그에게 평소 감자를 좋아해 왔음을 어필했다. 온라인 접수 시대에 직접 기관에 찾아가 출력한 지원서를 내는 할아버지가 된 느낌이다.


여러 사람이 함께 하고 있음에도 그 사람들이 누구인지 크게 개의치 않은 건 주식 투자 정도가 있을 것 같다. 주식처럼 모든 이의 목적이 확실한 프로젝트엔 아무래도 누가 함께 하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감자를 키우는 건 다른 문제다. 어떻게 다들 서로의 얼굴도 보지도 않은 채 시작할 수 있었을까? 어쩌면 누군가는 이것도 하나의 주식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 누군가는 나처럼 원래 감자를 좋아한다는 순수한 열정이 너무 강했을지도 모르겠다. 또 모임을 주최한 사람의 면을 보니 미친것 같은 사람은 있어도 진짜 미친놈은 오지 않겠지, 하는 기초적인 신뢰가 있었을 수도 있겠다.


 모두가 파이어족를 꿈꾸는 시대다. 4차 산업이라는 알 수 없지만 어째 군침도는 미래 단어를 깔고 부동산, 코인, NFT 등 결국엔 돈으로 치환되는 온갖 키워드가 난무한다. 그런 시대에 우리는 파이어족이 아닌 파밍크루가 되기로 했다. 같은 F지만 너무나도 다른 이 둘 사이엔 어떤 공통분모가 있긴 한걸까. 4차의 끝은 어쩌면 1차로의 회귀라는 기대감도 있었던 걸까? (사실 나는 좀 있는 것 같다) 어찌 됐든, 이유는 각자 다르겠지만 지금 이런 모임을 하기로 했다는 것은 "을지로 옥탑방에서 여럿이 함께 감자를 키운다"만으로 꽤 매력적인 일이었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게 우리는 감자를 키우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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