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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과 Jun 29. 2022

유철이형과 삼겹살

감자 모임에 불참했다

감자 모임에 불참했다. 유철이형과 술자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냥 술 먹느라 못 갔다고 할 정도로 뻔뻔하진 않기 때문에 휘영이에겐 그냥 다른 일이 생겼다고 적당히 둘러댔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유철이형과 좋은 시간ㅋㅋㅋ "이라고 답장이 왔다. 귀신같은 놈. 거짓말이라도 했으면 큰일 날뻔했다. 구라에도 다 타이밍이 있다.


유철이형과 소주를 먹으러 간 곳은 을지로4가의 주유소식당이라는 곳이었다. 삼겹살과 낙지를 판다. 정확히 하면 낙지볶음을 파는 곳 같은데 제일 많이 팔리는 건 삼겹살이었다. 그런데 그 삼겹살은 메뉴판에 없다. 정말 을지로는 알다가도 모를 곳이다. 역시나 메뉴판에 없는 삼겹살이 제일 맛있었고 반찬들도 하나같이 다 맛깔났다. 반찬에 감자가 있었나? 조림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다. 확실한 건 삼겹살을 한 줄 한 줄 구울 때마다 아까 휘영이의 문자를 받고 들었던 뜨끔한 마음이 미세먼지 씻기듯 씻겨나가더니 낙지가 나올 쯤엔 완전히 사라졌다. 이번 자리는 30대 중반이 다 지나가도록 어디엔가 완전히 정착하지 못한 나의 마음을 토로하는, 그러니까 일종의 고민 상담 자리였다. 자연스럽게 감자 모임이 있었다는 것조차 점점 머릿속에서 지워졌고 나는 온전히 나의 마음과 나의 미래 그리고 지금 당장 눈앞의 삼겹살에 깊이 빠져들었다. 유철이형은 원체 밝고 유쾌한 사람인데 별것도 아닌 고민들을 늘 유쾌하게 잘도 들어준다. 그래서 유철이형을 만나면 매번 오늘은 꼭 소주 1병만 먹고 들어가야지 했다가 어느새 3병을 비우고 있다. 형은 좋은 사람이 분명하지만 육체 건강엔 좋지 않을 것 같기도 하다. 그날 유철이형이 무슨 말을 해줬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그의 유쾌한 웃음과 야들야들한 삼겹살의 뒷맛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냉삼인가..?)


다음 날에나 일어나 남겨진 인스타 메시지를 읽어보니 어제는 아마 무슨 감자를 어디서 구매할 것이며, 언제 심을지, 양은 얼마나 할지 등을 정한 모양이다. 사실 상 제일 중요한 것들을 다 한 것이다. 이제야 조금 죄책감이 들었다. 하지만 참여도 하지 않고 한 것 마냥 써재끼는 건 그야말로 가증스러운 일이기 때문에 자세한 것들을 굳이 적지 않기로 했다.


유철이형은 감자와 아무 상관이 없다.     

낙지도 먹었다

 


여담

- 국내에서 소비되는 감자의 70% 수미감자다. 병충해에 강하고 수확량이 많은 수미감자.  

- 약간의 고민 끝에 씨감자는 두백감자로 하기로 했다.

- 두백감자는 오리온 감자연구소가 98년 개발한 종자로 수미에 비해 수분이 적고 단단해 감자칩을 만들기 좋다.

- 많은 진행들이 CPO (Chief Professor Officer) 의 자문으로 진행됐다.

- CPO 인혜님의 어머님은 경기도 광주에서 감자를 비롯한 다양한 농사를 지으신다.

- CDO (Chief Dentist Officer - 치과의사) 형규님은 바쁜 업무로 인해 미리 잦은 불참을 예고했고 대신 비용을 조금 더 지출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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