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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과 Sep 14. 2023

꽃이 떨어진 자리에 오이가 열린다



5월 중순에 꽃이 폈는데 (4월 중순에 모종을 심었다) 5월 30일엔 벌써 꽤 큰 오이가 자랐다.

한 달 반이면 오이를 볼 수 있는 것이다. 모양이 일정한 오이를 수확하려면 지지대를 2미터 정도는 되는 걸 세워줘야 좋은 것 같다. 오이는 지지대가 전부다. 딱히 한 게 없다. 벌레가 잘 생긴다 해서 약도 샀는데 한 번도 쓰지 않았다. 


화분도 오이랑 깔맞춤 ㅎ


잘한 건 없지만 실수는 많이 했다. 다양한 짓을 벌였지만 그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건 화분에 오이를 심은 것이었다. 우리는 텃밭에 심고 남은 오이 모종 7-8개을 길쭉한 화분에 심었다. 옹기종기 화분에 심어진 오이 모종을 보니 역시 아주 귀여웠다. 하지만 몇 주 만에 약을 잘못 먹은 중학생처럼 덮수룩 하게 자라버린 오이 잎을 보며 무언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오이를 화분에 키우는 건 아기 사자인 심바가 너무 귀엽다고 목줄을 달아 작은 개집에 넣어온 것이나 마찬가지다. 사실 오이는 모종이었을 때부터 잎이 넓고 까슬한 게 이후 보여줄 남다른 발육속도를 예고하고 있었지만 오이 줄기에 가시가 있다는 것도 모르는 도시인들로서는 그저 귀여운 풀때기로 밖에 안보였던 것이다. 


 화분 오이 중 절반이 밭으로 이장됐다. 이장된 오이 중 또 절반이 죽었던 것 같다. 을지가드닝클럽의 간택을 받아 젊은 시절 요절한 오이들의 명복을 빈다. 혹시나 다시 오이로 태어나더라도 다음 생은 완전한 노지에서, 옷걸이 부러뜨려 만든 철사가 아닌 최신 공정에 의해 만들어진 든든한 지지대와 함께 자라길 바란다.  

 분양받을 자리가 없어 화분에 남아있던 3-4개의 오이는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했고 무려 10개 정도 오이를 만들어냈다. 개천에서 용났다 라는 표현이 이제 더 이상 거의 쓰이지 않고 있지만 화분에서 오이를 낸 오이 모종들이 옛 말을 다시 상기시켜주고 있다. 이렇게 인간은 매번 헛발질을 하지만 자연은 늘 관대하다.   


화분에서 열린 오이, 어쨌든 자란다

 

도대체 오이는 어떻게 열리는 걸까? 잎과 줄기가 자라면 꽃이 핀다. 향은 없지만 노란 꽃이 꽤 보기 좋다. 놀랍게도 그 꽃을 매달고 있는 꽃대가 오이다. 처음에는 존재감이 없었던 꽃대가 점점 굵고 커지더니 오이가 됐다. 

 다양한 작물을 심었지만 오이가 우리를 가장 놀라게 했다. 작은 풀때기를 사다가 심었을 뿐인데 한달 만에 팔뚝 만한 오이가 주렁 주렁  열리다니. 각종 모니터 안에 갇혀있는 도시인들로서는 이런 것들이 매번 신기하다. 식물도 비쥬얼이 중요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존재감이 없었던 꽃대가 점점 굵고 커지더니, 오이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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