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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과 Sep 15. 2023

오이도령이여, 지지대를 세워주소서

오이에세이3


을지로 작업실에 옥탑 공간이 있어 작은 텃밭을 만들었는데 일이 커졌다.

오이를 심었기 때문이다. 물론 오이가 이럴줄은 몰랐다. 최선을 다해준 있는 오이들에겐 조금 미안한 이야기지만, 사실 오이가 진짜로 열릴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사방에 주렁주렁 열린 오이들 입장에선 열심히 공부해서 성적을 냈는데 부모라는 놈들이 "엥, 니가...?"하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다시 한 번 오이들에게 사과하고 싶다. 서울 을지로 한복판에서 이런 성과를 낸 건 오이계에서도 무척이나 드문 일일 것이기에 오부심을 가져도 될 거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다음 생이 있다면 부디 공기 좋은 시골에서 태어나길 기원하는 바이다.     


작업실의 주인이자 오이를 전혀 먹지 못하는 (나중에 알게됐다...) 콥피디 역시 내가 사진을 띄웠을 때 물음표를 일곱개나 보낸 걸 보면 대부분이 비슷한 마음이었음이 분명하다


오이의 선방에 힘입어 우리는 뒤늦게 지지대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20세기 초 육상계에 획을 그은 지미 펠트런은 어린 시절 부모의 반대로 인해 맨발로 운동을 했는데 지역 대회에서 금메달을 휩쓸자 뒤늦게 그의 재능을 알아챈 부모가 최고급 런닝화를 선물했다, 는 일화는 물론 방금 지어낸 이야기다. 어딘가 있을 법한 뻔한 이야기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생각나지 않아 그냥 지어냈다. 이제 막 자라기 시작한 덩굴 식물들에게 지지대란 런닝화나 마찬가지다. 을지로 오이들은 신발이 없었음에도 오이라는 초록색 금메달을 따내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이젠 그들에게도 나이키 베이퍼 플라이에 버금가는 런닝화가 필요하다.



제대로 된 지지대없이 마구 자란 오이


진짜 신발이었으면 오히려 간단했겠지만 우리는 한 번도 지지대를 구매해본적도 세워본적도 없었기에 감을 잡지 못했다. 사진을 찾아봐도 온라인 농장게임에서나 볼법한 으리으리한 오이밭과 건축사가 자로 재며 만들어 사람이 올라가서 살아도 될 것 같은 엄청난 지지대들만 나와 기만 죽을 뿐이었다. 꼴랑 한평반짜리 텃밭엔 어떤 지지대를 만들어야할까. 그때 혜성같이 등장한 사람이 오이도령이다.  


홀로 3차 지지대 작업중인 오이도령


을가클 멤버 중 한 명인 오이도령은 게임회사에 재직중인 평범한 직장인인데, 이미 회사 옥상에서 비슷한 일을 벌인 적이 있다. 경력직이었던 것이다. 오이도령은 잘 나서진 않지만 한 번 나섰다하면 맡은 바는 확실히 끝내고 마는 타고난 일꾼이었는데 엉망으로 자라는 오이를 보면서도 별다른 제스처를 취하지 않다가 몇 번 닦달하니 장비를 들고와 말없이 지지대를 만들기 시작했다. 하필 그날 머리를 도령처럼 따고 개량한복같은 것을 걸치고 왔는데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도령같아 오이도령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물론 여성이다)


본인이 만든 2차 지지대 시찰중인 오이도령


 오이도령은 마치 레고를 조립하듯이 지지대를 만들기 시작해 첫 번에는 2단, 얼마 뒤 진행된 2차 지지대 작업에선 3단으로 지지대를 만들어 오이의 성장에 큰 공헌을 했다. 실제로 오이는 2단 지지대가 만들어진 이후로 비약적으로 자라기 시작해 3단이 완성되었을 때는 한평반 짜리 텃밭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다양한 작물을 키워 온 을가클에서 이처럼 기세를 떨친 종은 여태까지도 드물다. 별다른 생색도 내지 않고 조용히 지지대만 만드는 모습을 보니 이래서 사람들이 경력직을 선호하는구나, 다시금 현실을 되새기게 됐다. 만약 오이도령이 이북의 협동농장같은 곳에서 일했다면 인민의 영웅이 되어 훈장을 여러 개는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북한보다도 보상체계가 없는 조직인 관계로 오이도령은 이후에도 중요한 작업에 동원만 됐을 뿐 특별한 리워드를 받진 못했다. 부디 이 글이 오이도령의 다양한 취미생활에 활력이 되길 바랄 뿐이다.   



 

직접 수확한 오이를 보며 흡족해하는 오이 도령  / 오이도령의 지지대 작업을 보러 오기 위해 모여든 군중들


3차 지지대 작업 이후의 오이밭. 왼쪽엔 막 자라기 시작한 바질과 고추, 수확을 앞둔 감자들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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