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에서 안 죽으려면 집안일 설계가 필요하다

엄마는 어떻게 살아온 거지?

by 심미금



독립한 지 몇 달이 지났다.

내 취향으로 채운 나만의 공간에 안착하는 동안 계절은 바뀌었고, 몇 번의 월세와 공과금이 생활비 통장에서 빠져나갔다. 나름 넉넉하다고 생각했던 곳간이 비어 가는 대신 그 안에는 새로운 이야기들이 채워졌다. 미래에 대한 고뇌와 루틴하고 평범한 하루들, 그리고 언제까지 새로운 일이 생길까 의문이 생길 정도로 비정기적으로 생기는 사건들까지. 나름 열심히 서울의 삶에 적응하고 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나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거고 모두가 말하는 만고의 진리에 크게 벗어나지 않다는 것이다. 숨 막히게 낯설었던 침묵은 나를 위한 고요로 바뀌었고, 아직 어설프지만 부모님이 채워주던 삶을 스스로 채우는데 적응해가고 있다. 첫날 화를 돋우던 문제들은 이제 심심한 일생에 적당한 긴장감을 주는 존재들로 바뀌었다.


무엇보다 고무적인 건, 이 작은 공간에 대해 진심으로 애정을 갖게 됐다는 것이다.

사실 주변 사람들이 독립하니 어떠냐고 물어보면 좋다고 대답했지만 좋은 것과 별개로 이 집과 꽤 오래 낯을 가렸다. 입주청소로 전세입자의 흔적을 지워고 내 물건을 채웠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의 집에 얹혀사는 것 같은 느낌이 한동안 들었다.

특히 화장실은 이상하게 어둡게 느껴지고 오래 머물고 싶지 않아서 쫓기듯 샤워를 마치자마자 나오곤 했다. 자려고 누우면 오래된 냉장고에서 나는 소음에 놀라고, 때론 갑자기 이유도 없이 불안해져서 건물 밖을 나가 크게 한 바퀴 돌며 문제가 없는지 확인하고 계단으로 집에 돌아오곤 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지금도 의문인데, 아마 새로운 공간에 적응 못한 미어캣들이 계속 불안 신호를 보낸 게 아닌가 싶다. 이곳은 아직 완벽한 네 영역이 아니라고.

가만히 앉아 불안해하기보단 몸을 움직여 확인시켜 주는 게 미어캣을 잠재우는데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하지만 불안하다고 밤마다 집 근처를 배회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결국 이 공간을 완벽하게 내 영역이라 인지하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내 취향인 가구로 집을 꾸미고 먹고 자고 생활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적응이 되겠지만 나에겐 좀 더 빠른 적응이 필요했다. 그래서 집안일을 하기 시작했다. 굉장히 빡세게.


이사 초반에는 그야말로 청소와 정리를 위해 살았다. 이사 초반이니 매일 가구가 들어오고 정리해야 할 짐들이 산더미이니 바쁜 게 당연하지만 아침에 눈 뜨고 밤에 잠들 때까지 청소에 지배 당해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매일 청소기를 돌리고 알코올 소독제를 뿌려가며 집안 곳곳을 닦고 다시 밀대로 밀고 빨래를 하고.

특히 애정이 안 가는 화장실은 천지개벽하겠단 마인드로 가장 많은 시간을 들여 짧은 텀으로 청소했다. 화장실 천장까지 박박 닦고 오래된 곰팡이와 녹을 최대한 지우려 노력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마음으론 분명히 느낄 수 있는 지나간 사람들의 흔적을 닦아내려 노력한 것이다.

이제 다들 나가 여긴 내 공간이라고.


이번 여름이 유난히 더워서인지, 인생 최고 몸무게를 경신하며 땀샘이 열려서 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아무리 에어컨을 켜도 청소를 시작하면 땀이 비 오듯 쏟아져서 나중에는 모든 걸 포기하고 실외기실을 닫아 버리고 에어컨을 끄고 창문을 활짝 연채 하루 종일 청소를 했다. 원래도 환기에 집착하기 때문에 35도의 뜨거운 바람이 집안에 들어와도 놀랍지 않았다. 오히려 집안이 찜통인 데다 청소로 땀이 나니 그 뜨거운 바람조차 시원하게 느껴졌다.


'여름은 원래 더운 거지.'


올여름엔 그 생각을 가장 많이 했었다.


다른 집안일을 할 때도 그렇지만 화장실 청소를 할 땐 땀과 물이 동시에 비 오듯 쏟아지는 걸 느꼈다. 이어폰을 끼고(최소 두 시간은 이 일에만 집중하겠단 뜻이다) 온갖 종류의 세제를 사다가 용도에 맞게 바꿔가며 청소를 하며 쓸고 닦고 나면 땀과 물에 온몸이 젖었다. 그 대신 깨끗해진 화장실에서 샤워를 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으면 그렇게 상쾌할 수가 없어서, 일주일에 한 번은 이 대청소를 감행했다.


처음엔 스쳐가던 사람이 시선을 마주치고 이름을 부르면 인연이 되듯, 이 작은 집을 매일 쓸고 닦고 하다 보니 단순히 물건을 두고 삶을 사는 것 이상의 스토리가 쌓여가는 게 느껴졌다.

그렇게 이 작은 원룸은 드디어 나에게 내 집, 서울의 안식처가 되었다.

내 손이 닿지 않은 곳이 없고, 내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내가 정한 룰대로 움직이는 나만의 천국.


그리고 지금은 그 천국에서 피곤해 죽을 지경이다.




천국에서 죽는다니 이게 무슨 조화인가 싶지만 정말 그 말 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얼마 전 너무 피곤해서 일찍 잠자리에 누운 날이 있었다. 매주 보던 예능 본방도 포기하고 잠이나 자야겠단 생각으로 침대로 돌아가 누웠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거 지금 안 바꾸면 이 집에선 집안일만 하다 세월이 다 가겠어.'


그런 생각이 드니 잠이 싹 달아나면서 나의 지난 몇 달을 자동으로 복기하게 됐다.

정말 이 집에 이사 온 후로 내가 한 거라곤 집안일과 살아내기 두 개 밖에 없었다. 물론 두 일 다 인간의 삶에 너무 중요한 부분이고 더 위대한 어떤 일을 하기 위해 포기해야 할 것들이 아니란 건 잘 알지만 그렇다고 이것만 하고 살 수는 없는 거 아닌가 하는 근본적인 의문이 들었다.


이사 초반에는 집정리에 온 시간과 정성을 쓰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언제 다시 일하게 될지도 모르는 거고, 한 번 일을 시작하면 내 생활 패턴을 일에 맞춰 바꿀 수밖에 없기 때문에 최대한 빨리 할 일을 해놓고 언제든지 일을 시작할 수 있는 상태로 만들어 놓자 생각했다. 그리고 일이 구해지지 않아서 느끼는 초조함을 잊는 데는 청소만 한 게 없었으니까.


이사 후 집정리에 든 시간을 생각해 봤을 때 현실적으로 든 시간은 3주 정도? 보수적으로 잡으면 한 달 정도.

셀프 이사한 원룸 자취생의 이사 정리가 길어봤자. 그리고 솔직히 고백하자면 여전히 눈에 거슬리지만 해결하지 않은 문제들이 넘쳐난다.


그러면 그 후엔 상황이 좀 더 나아져야 하는데, 왜 상황이 나아진 느낌이 안 들까? 나름 운동도 하고 이력서도 수정하고 공부도 하고 생산적인 일을 해보려고 노력하고 있긴 한데, 여전히 가장 큰 에너지는 집으로 흘러가고 있단 느낌을 받았다.


서울로 독립하면 매일 밤마다 야식과 술을 먹고 마시며 풍류를 즐기는 무릉도원의 삶을 살 줄 았더니만 이게 무슨 일이람. 왜 내 손에는 술잔보단 청소기와 세제가 들려있는 날이 더 많지? 스프레이형 세제를 너무 많이 썼더니 왼쪽 손목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탄산수 병 따기를 포기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니 분명 청소는 좋은 건데? 집도 깨끗해지고 복잡한 마음도 정리되는 행위인데?

유명인들이 성공하고 싶으면 청소부터 하란 말을 수도 없이 하지 않았나?

내가 뭘 잘못 생각하고 있나?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 생각하며 일상을 복기해 봤다. 그전까지는 청소는 무조건 좋은 거라 생각하기만 했는데 뭐가 문제일까를 중점으로 놓고 돌이켜 보니 의외로 어렵지 않게 답을 찾아낼 수 있었다.


나는 집안일 요령이 더럽게 없다는 것. 게다가 무지성으로 맹목적으로 청소를 했다는 것.

청소도 중요하지만 내 삶을 이루는 가치들의 우선순위를 생각하지 않았고, 효율적, 체계적으로 해낼 머리가 없었다는 것.


손이랑 마음 가는 데로 집안일을 하다 보니 다른 일을 아예 하지 못하거나 하다가도 끊기는 경우가 잦았고 집안일 순서가 꼬여서 하루에 끝낼 일을 끝마치지 못했다거나 했던 일을 또 반복하는 실수를 자주 했다.

그리고 이걸 청소도 재능이라고 말하기엔 조금만 차분히 생각하면 해결 됐을 문제라 핑계 댈 수가 없었다.

청소가 재능의 영역이면 또 어쩔 건데, 안 할 거야? 앞으로도 살아가려면 원인을 찾고 계획을 세워서 처리해야지. 기술은 배우면 되는 거니까. 그리고 지금처럼 여유 있을 때 방법을 찾아 놔야지 일이라도 시작하면 집안일이 일에 악영향을 주는 악의 굴레가 시작될 게 뻔했다. 내 성격상 지금의 기준보다 집이 더러워지면 분명 스트레스를 엄청 받을 테니까.




문제를 해결하려면 현재 내가 가진 조건과 할 일을 파악하고 그 후에 순서에 맞게 설계를 해야 한다.

여기에는 일의 우선도, 다른 중요한 일을 하기 위해 적당히 눈감을 수 있는 일의 정리도 필요했다.


일단 조건을 생각해 보면 절대적인 청소 공간은 줄어들었다.

본가에 있을 때에 비해 집 크기도 줄었고 사는 사람도 3인에서 1인이 됐으므로 모든 집안일의 절대적인 양이 줄어든 셈이다.


청소할 공간도 양도 줄었으면 일이 더 쉬워져야 하는데? 3명이 하던 일을 혼자 하게 돼서 오래 걸리는 걸까?

화장실 청소처럼 내가 하지 않던 일도 내 몫이 됐으니 영향이 없진 않겠지만 그리 큰 이유 같진 않았다.

전략, 작아진 공간과 내 라이프 스타일에 맞춘 루틴과 설정의 부재가 문제였다.


초반에 내 생활을 돌이켜 보면 이렇다. 점심을 먹으려고 식재료를 꺼내고 주방기구를 다 꺼내서 요리를 하는데(일단 요리 실력이 부족함으로 시간 추가) 요리하다가 후드에 기름이 튀면 후드를 바로 닦아야 직성이 풀렸다.(청소 시간 추가) 후드를 닦다가 다른 곳에 얼룩이 눈에 띄면 참지 못하고 주방 기구를 다 들어내고 행주와 알코올로 주방 청소를 시작한다.(청소 시간 또또 추가) 이미 여기에서 식사 시간이 한참 밀린다.


겨우 식사를 하려고 해도 식탁이나 바닥에 튄 게 보이면 바로 닦아야 했고, 그러다 보면 머리카락이나 먼지가 보이게 되고 결국 청소기를 꺼내 청소기를 밀고 한 김에 대걸레질까지 하게 된다.


빨래의 경우에도 세탁기도 빨래 건조대도 본가보다 줄어들었기 때문에 적은 양을 여러 번에 나눠서 해야 하는데 한 번 빨 때 걸리는 시간을 계산하지 않고 돌렸다가 타이밍이 애매해져서 외출을 못한다거나, 요리 타이밍과 빨래가 끝나는 시간이 겹치면 급하게 인센스 스틱을 켜서 냄새를 날리고 창문을 열고 냄새가 빠져나갈 수 있게 온갖 쇼를 한다. 시간이 길어지면 탈수 버튼을 몇 번 더 누르며 시간을 벌기도 했다.


수건은 집 앞 코인 세탁소에 가서 건조기에 돌리는데, 제일 먼저 수건 빨래를 했다면 다른 빨래를 하는 동안 건조하고 집에 와서 접어 넣는 것까지 동시에 진행할 수 있는데 그걸 계산 못하고 수건을 가장 마지막에 빨아서 난감했던 적도 많았다. 오후 내내 빨래에 붙잡혀 있었던 셈이니까.


화장실 청소는... 그야말로 시간 잡아먹는 괴물이었다. 가뜩이나 마음에 안 들어서 눈에 보이는 걸 매일 박박 닦고 싶은 심정인데 체력이 허락하는 선에서 자주 청소를 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턴 화장실 청소를 할 생각만 하면 한숨이 났다.


화장실에 있는 물건을 다 꺼내고 물을 뿌리고 세제를 뿌리고 기다렸다가 천장, 찬장 윗부분, 붙박이 조명에 눌어붙은 얼룩부터 닦으며 내려가는데 청소하는데 보통 두 시간이 소요됐다. 물을 많이 사용한 건 기본이고, 이렇게 잦은 주기로 화장실에서 물을 쓰고 있으면 이웃집에 덱스터가 산다고 생각해도 이상할 게 없을 거 같았다.


본가에서 살 때부터 스퀴즈로 물기를 닦고 나오는 습관이 있었는데, 곰팡이 제거를 하려면 화장실이 건조해야 한다는 건 몰랐다. 오래된 곰팡이들이 있어서 닦아 내야 하는데 매일 물기가 있으니 효과가 날 리가...

청소 효과가 떨어지니 자연스럽게 화장실 청소에 들인 시간에 비해 만족감도 적었다.


공간이 작아진다는 건 케어할 부분이 줄어든다는 의미기도 하지만 작은 공간에서 모든 일이 이뤄져야 하기 때문에 더 철저하게 순서를 계획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어떤 순서로 어떻게 집안일을 하느냐에 따라 그날, 그 주에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 지도 정해지니까.


그래서 나는 내 작은 공간에 맞는 루틴을 정리해 보기 시작했다.

집안일 왕 초보인 내가 공간을 깨끗하게 유지하면서 내가 하고 싶은 걸 다 하려면, 몸에 체득되기 전까진 전략을 짜면서 행하는 것 외엔 뾰족한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 집 청소 좌우명은 [이틀에 한 번, 일주일에 한 번, 한 달에 한 번] 그리고 [모든 건 위에서부터 아래로]다.

아, 여기에 추가로 [멍 때릴 땐 시선을 살짝 위로, 안 되겠으면 하늘을 봐라]도 있다.


여전히 시범운행 중이며 언제든 바뀔 수 있지만, 현재 나의 청결도와 청소를 감당할 수 있는 에너지가 심사숙고 끝에 내린 합의점은 이러하다. 이틀에 한 번 자잘한 청소를 하고 일주일에 한 번은 눈에 보이는 것들을 싹 청소하고 한 달에 한 번은 각 잡고 제대로 한다. 그리고 층고가 높은 직사각형 구조의 집이니 무조건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것으로. 그리고 청소하지 않을 때 멍 때리며 집안 어딘가를 바라보다 보면 맘에 안 드는 게 꼭 발견되기 때문에 멍 때리고 싶으면 의식적으로 시선을 높이 들던가 아예 창문 밖 하늘을 보기로 했다.

그런 의미로 창가에 책상을 붙인 건 탁월한 선택이라 생각한다.


빨래가 생기면 일단 자연 건조해서 바짝 말린 후 빨래통에 모아뒀다가 이틀에 한 번 빨래하는 것으로 하고 수건은 일주일치를 모았다가 한 번에 빨고 건조기까지 돌려서 세팅하는 것으로 루틴을 정했다.

빨래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 안으로 끝내는 걸 목적으로 하되, 피치 못하게 빨래를 건조할 때 겹치는 요리 타이밍에는 냄새가 거의 나지 않는 샌드위치나 두부 오이 비빔밥 등 몇 가지 레시피를 돌려서 요리하기로 했다. 이왕이면 다이어트도 할 겸 건강 레시피 중 입맛에 맞는 것들은 골라서 재료와 레시피를 적어 냉장고에 붙여놓고 빨래가 건조되는 동안에 골라서 요리한다.

먼지는 위에서 아래로 털어준 후에 청소기를 밀고 대걸레질을 해준다.


이틀에 한 번 집안일을 할 때 마음가짐은 무조건 가볍게! 과하게 하려 들지 않고 당장 눈에 보이는 문제점만 해결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그렇게 하면 실질적인 집안일을 하는 데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사실 처음에는 내가 정한 규칙이 맘에 들지 않았다. 눈에 거슬리는 건 너무 많았고, 3일에 한 번 가볍게 청소한다는 게 이론적으론 맞는 거 같은데 이렇게 짧게 청소하고 끝내도 되나? 눈에 보이지 않게 지저분한 게 분명 있을 거 같은데? 하는 의문을 가졌었다.


이 의문을 참지 못하고 집안일을 더 깊게 한 적도 있었고, 그렇게 시간을 잡아 먹히는 경험을 몇 번 하고 나서 창 밖에 시선을 두든 아예 집 밖을 나가버리는 선택을 하게 됐다. 도서관과 헬스장은 에어컨도 공짜니까.


결과를 보기 전까진 의문이 많았는데, 이 별 거 아닌 3일이 모인 후 일주일 째가 되는 날 청소를 해보니 각 잡고 청소를 하려고 해도 평소보다 할 게 없는 것이 느껴졌다. 묵은 때가 잘 없다 보니 오염 제거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고 청소가 금방 끝나서 서랍장을 다 열어 환기를 시켜도 더 여유롭다는 걸 깨달았다.


화장실은 확실히 그전에 시간과 정성을 많이 들여놓은 덕분인지 물 때나 곰팡이가 끼는 게 덜해졌고, 무엇보다 전 세입자의 흔적이 남아있단 느낌이 거의 들지 않기 시작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느낌으로만 느껴지던 미묘한 감각들이 서서히 사라지니 같은 조명이 괜히 더 밝아 보이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무작정 내 몸을 쓸게 아니라 시간의 힘도 필요했던 이 작업은 청소 전문가인 엄마의 조언이 큰 영향을 줬다.

직업으로 청소일을 하시는 엄마는 모든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하려 달려드는 건 미련한 일이라며 시간을 두고 같은 작업을 반복하며 서서히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한다고 조언해 주셨다. 처음엔 이걸 어떻게 눈 감고 살아라고 했는데, 역시 한 번 해보니 전문가의 말이 맞는구나라는 걸 깨달았다.

삶의 어떤 문제든 한 번에 해결하는 건 불가능하고 서서히, 시간의 흐름으로 덮어가며 새로운 길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은 만고의 진리인가 보다.


물론 집의 크기상, 일의 종류상 어쩔 수 없이 매일 해야 하는 일들도 존재하지만 매일 하지 않아도 될 것들을 분리해내고 나니 그 일들을 수행하는데 큰 힘이 들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현재 집상태를 둘러보면 제법 견딜만하게 마음에 든다. 엄청 깨끗하진 않지만 갑자기 누가 와도 '나는 이렇게 살아'하고 내놓을 수 있을 정도라고 해야 하나.


역시 사람에겐 룰이, 잘 모르는 일에 덤빌 땐 계획과 기준이 있어야 한다는 걸 또 한 번 깨닫는다.

집안일 일을 정리하면서 개인적인 일의 루틴도 바로잡기 시작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지금은 이걸 할 시간, 청소는 어제 했으니 내일! 이 마음을 가지니 눈에 거슬리는 게 있다가도 전보다 더 빨리 흐트러진 집중력이 돌아온다. 여전히 내 안에 미어캣들은 쓸데없는 일에 걱정이 많지만 루틴이 있다는 것만 상기시켜 줘도 금방 잠잠해진다. 좀 생각이 많아서 그렇지 나쁜 애들은 아니니까.


그리고 이렇게 살다 보니 벌써 다음 집에 대한 기준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땐 꼭 베란다가 있어서 빨래를 널 수 있는 곳으로 가야지. 적어도 빨래가 내 저녁 메뉴 선택에 걸림돌이 되지 않는 상황만 피할 수 있어도 더 편하겠단 생각이 든다. 그리고 다음 계절을 또 지내고 나면 또 다른 기준이 생기고 루틴에 변화가 오겠지.


나도 그때의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삶을 살고 있을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