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탈하게 잘 지냈다는 감사한 마음뿐 아니라, 더 있고 싶다는 아쉬운 마음도 동시에 있는 게 분명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시원한 마음, 즉 지긋지긋한 이방인으로서의 불편한 생활을 졸업한다는 홀가분한 마음도 찾아온다.
처음 벨기에에 왔을 때, 초기 적응을 위한 생활은 안개 낀 거미줄을 하나씩 재끼고 햇빛을 마주하게 되는 도전적인 기분과 이루었을 때의 성취감이 제법 있었다. 하지만, 마무리 시기에는 컬처 쇼크에 이미 적응하였기에 크게 힘들진 않더라도, 여러 감정이 복합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중고차 판매 사건을 통해 그 심란한 심정을 적어보고자 한다.
떠날 때가 되면 인사부서에서 제공해주는 나름 ‘마무리 체크리스트’라는 1장짜리 지침서를 받을 수 있다. 10여 가지 이상의 항목이 촘촘히 정리되어 있어 시기와 접근 대상만 잘 챙기면 큰 무리 없이 해결할 수 있어 걱정은 없다.
예를 들면, 아이디카드는 어떻게 반납하고, 운전면허증은 어디서 교환하는지, 그리고 인터넷과 전기·가스는 언제 누구에게 해지 신청을 하는지 등등이 체크리스트에 잘 나타나 있었다. 하지만, 예측하지 못한 새로운 복병들이 숨어있어 마무리하는 기분이 그다지 깔끔치가 않다.
과거 선배들이 주로 거래했던 업체 A는 주로 두 가지 옵션을 준다. 바로 원하는 시점에 업체에게 직접 판매하는 옵션과 주차장에 일정 기간 전시해서 고객이 살 때까지 기다리는 옵션이다.
물론, 후자가 불확실성이 높아 더 큰 가격을 취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장기간 신경 쓰는 게 귀찮고 빠른 현금화를 위해서는 어느 정도 손해를 보면서 전자를 선택하는 사람도 있다.
당연히 나도 이처럼 간단히 처리할 계획이었으나, 생각보다 업체가 너무 싼 가격을 제시해서 다른 결정으로 전환했다.
집 청소 및 보수를 제대로 하여 에따델류(집 상태 검사 후 보증금을 차감하고 환급)에서 만점을 받기보다 중고차를 정상 가격에 파는 것이 훨씬 생산적인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첫 번째로 차량 무료견적 시스템 업체와 약속을 잡았다. 회사에서 10분 거리인 그곳에 도착 후, 차 가격을 평가하는 친구에게 어필을 하려 시도했으나, 그저 대기실에 앉아 있으라고만 했다. 30분 정도 사진 찍고 시동 걸어 시운전을 하더니 어디론가 사진 파일을 전송한다. 평가 전문가 심사 결과를 5분 후 볼 수 있다고 한다.
결국 내가 예상한 가격보다 훨씬 낮게 책정되었다. 너무 황당한 가격이라 예상 시나리오에서 벗어나는 상황이었다.
일의 자리까지 0이 아닌 숫자가 나오므로 왠지 체계적인 계산법에 의한 가격이라고 생각 들게 만들었다.
사실 다른 현지인 친구가 자기 차를 예상보다 크게 거래했다는 추천으로 오게 된 곳이 여기였는데.... 나에게는 왜 이렇게 가혹한 가격을 제시할까?
그 친구는 이유를 두 가지로 설명해 주었다. 서유럽의 환경규제정책으로 인해 디젤 차량이 가솔린보다 인기가 없어 현재 공급 포화상태라는 것이다.
따라서 내 차는 팔리더라도 동유럽인 폴란드, 불가리아 등으로 수출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내가 농담으로 불가리아까지 차를 몰고 가면 원하는 가격을 받을 수 있냐고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그리고, 엔진이 상대적으로 작은 편이라 강한 엔진을 선호하는 벨기에 사람에게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그럴싸한 설명이라 반박도 못했지만, 사실 황당한 가격에 협상할 생각은 해 보지도 못하고 일단 후퇴했다.
퇴근하는 길에 혹시 몰라 워털루 동네의 조그만 중고차 업체에 들려 오늘 받은 가격이 현실적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문의를 해 보았다.
그곳도 빠르게 5분 넘게 체크하더니 업체에게는 최대 2만 유로, 전시판매 시에도 적정 가격을 받기 힘들것이라고 설명했다. 결국은 2만 유로가 중고차 업체에서 내 차를 평가하는 현실 가격이란 걸 알게 됐지만, 온라인 사이트에 있는 가격과는 약 5천 유로 차이가 났다.
결국 나는 판매업체가 아닌 온라인 직거래를 시도해 보기로 했다. Auto B라는 사이트와 2 Hands라는 사이트에 올리기로 했다. 회원가입 후 사진을 10장 이상 찍어 올리고 몇 주간 홈페이지 1면에서 돋보이게 하는 기능을 추가 투자해서 2대의 차를 올렸다.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상반된 사건이 벌어졌다.
먼저 21만 킬로를 뛴 늙은 말 폭스바겐은 전임자에게서 3천 유로로 오자마자 직접 산 차였다. 그 당시에는 3년을 타고 폐차하겠다는 생각이었으나, 3년간 별 탈 없이 잘 탔으며 지금도 타고 다니는 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
토요일 아침에 일어나서 사이트에 올리자마자 30분 후 근처 동네에서 전화가 왔다. 그리고, 가르쳐준 주소로 바로 오겠다는 것이다. 난 차의 오른쪽 눈에 교통사고로 인한 부상이 있는데도 2,900유로로 다소 거품 있는 가격을 제시했으나, 그는 차를 몰아보고 계속 살펴보더니 여러 가지 지적을 계속한다.
내가 단도직입적으로 얼마에 사고 싶냐고 물었더니 그는 2,500을 불렀고 난 2,700으로 최종 거래를 마쳤다. 계약서를 작성하여 서로 서명하고, 그의 주소와 이름을 받아 적었다. 내가 딸 학교 픽업을 위해 한 달 후에 양도하겠다는 조건을 내 걸었는데 그는 시원하게 수락했다.
'왜 진작 이렇게 깔끔한 직거래를 하지 않았을까' 라며 후회했다. 새로운 아메리카 대륙을 개척한 콜럼버스가 이런 짜릿한 기분이었을 것이라고 믿으며...
하지만, 다른 새 차는 전혀 다른 결과를 초래했다. 이 차는 2016년에 도착해서 현지에서 산 것이었고 6만 킬로를 탄 매력도가 높은 차였다.
이 차는 온라인에 있는 유사 차량보다는 상대적으로 싼 22,900유로에 올렸다. 2-3일 정도 걸리긴 했지만, 역시 어떤 고객의 입질이 오기 시작했다. 똑같은 방법으로 주소를 알려주며 와서 직접 보고 가격은 협상 가능하다는 제안을 했더니, 이상한 답장이 'Dominique'라는 사람으로부터 이메일이 왔다. 내용은 아래와 같았다.
“너의 차가 맘에 든다. 내가 해외 출장 중이라 너희 집에 갈 수가 없다.
그러니 네가 제시하는 가격을 우편 전신환으로 내일 아침 일찍 송금할 테니 성명, 주소, 전화번호, 송금 희망 금액을 보내달라”
바로 답장을 썼다. “고맙지만, 유럽의 우편 전신환 제도를 내가 잘 모른다. 은행 계좌 이체와 비슷한 거냐?”라며 신중하게 시간을 벌었다.
반가운 제안이었지만, 상식적이지 않아 직장 동료들과 상의를 했다. 모두들 흥미진진해했고, 불어 쓰는 현지인들은 의심스럽다고 했으며, 일부는 유럽 우편 전신환 제도를 검색해보니 한도가 2,500유로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결국 그 친구는 계약금 10%를 보낼 의도라고 우선 선의로 해석하게 되었다. 하지만, 다음날까지 아무 소식이 없더니 이튿날, 이렇게 답장이 왔다.
“먼저 늦은 답신에 미안하다. 영어로 보내야 할 것을 깜빡하고 불어로 보냈는데 네가 받았는지 모르겠다.
너의 정보를 일부 받았지만, 희망 송금 금액을 보내주는 데로 최대한 많이 내일 아침에 보내줄게.”
잠자는 밤 11시에 이런 답신이 와서 아내를 깨울 수도 없었다.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 구글 검색에 그의 이름을 무심코 검색해 보았다. 서너 개 되는 관련 사이트가 드러났고 그의 페이스북은 잠금 상태여서 아래 사이트를 클릭했더니 신종 인터넷 사기범(Scam) 사례가 나오고 유사 메일을 받은 사람의 경각심을 주는 리플이 주르륵 달려 있었다.
난 그 내용을 보자 눈에 힘줄이 뻗치고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2년 전에는 취업자 대상 고용주 사기꾼으로 활동하던 그가 무료 중고차 사이트의 회원들을 대상으로 유사 수법으로 아직도 사기를 치고 있는 중이다. 벨기에 사람 중에는 적어도 소매치기나 도둑 같은 잡범들만 있을 뿐, 절대 교활한 사기꾼은 없을 거라는 내 확신이 한순간에 무너져버렸다. 피해자가 계속 속출하고 있는데도 왜 경찰들은 그를 잡지 않는 것일까?
그 사이트를 확인 후 난 그에게 답장을 보내지 않았더니, 다급해진 그의 목소리가 담긴 이메일이 재차 삼차 왔으며, 무응답으로 일관했더니 더 이상 Dominique의 메일은 오지 않았다.
지금도 그는 꾸준히 그 이메일로 복사해서 여러 명에게 온라인 상에서 뿌리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분노가 치밀었다. 하지만, 다가오는 이사 날이 오기 전에 빨리 팔아야 하는 것 때문에, 그리고 준비해야 할 마무리 리스트에 쫓기는 마음 때문에, 나는 경찰에 신고할 힘이 점차 사그라지는 걸 몸소 느꼈다.
현실에 나약해진, 마무리에 복잡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는 나 자신에 서글퍼지면서 그저 정들었던 벨기에를 빨리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갑작스레 들었다.이방인으로서 불편하고 황당한 상황을 마무리 시점에도 방심할 수 없는 걸 보니 이제는 속히 벗어 던지고 싶다고 해야 할까... 그런 복잡한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