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벨기에에서 나의 자동차세 환급이 최종 처리되어곧 계좌 이체될 것이라고 현지 지인에게 연락이 왔다.이사 후에 오는 모든 우편물은 그 친구 주소로 배송하도록 조치했기 때문에 알려온 것이다.
6월에 신청했으니 12월쯤벨기에 재무부에서 소식이 올 거라 예상했는데, 생각 외로 빨리 처리됐다. 하지만, 금액만 확정되었을 뿐 계좌이체도 며칠이 추가로 소요될 것이라는 예상이다.
이처럼 생각보다일찍 처리되어도, 불확실성이 없어졌다 할지라도 결코 기분이 좋아지거나, 스트레스가 해소되는 게 아니다. 그냥 무던해진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3년간 벨기에 살면서 내 몸에체화된 심신수련 때문이다.우체국을 가도, 구청을 가도, 보험사에 이메일을 보내 요청을 해도 일단 언제 보상 처리될 것이란 통보가 없다. 전화를 해도 불어와 더치어로 ARS 서비스를 하기에 결국 확인하러 직접 가볼 때도 많다.
난 6개월쯤 지나서야 아래와 같은 '도 닦는 참선의 마음'에 이르게 됐다.
"포기할 때쯤 돼서야뭔가이루어지리라."
"그저 잊고 있다가 문득 생각이 들면 그다음 날 처리되어 있으리라."
"언제 처리되는지는 중요치 않다. 되기만 한다면 이번 달이든, 다음 달이든 무슨 상관이겠는가."
이 정도의 마음 수양이 되어야 비로소 벨기에 생활에 적응할 수 있다. 벨기에의 행정 처리는 그만큼 매우 느리다. 그래서 초기 정착을 마무리하는데 약 4-6개월이 소요된다.
유럽 사람들은 대개 친절한 편이지만, 느린 행정에 익숙해져 있기에 그들은 서두르는 나를 보고 오히려 비정상으로 여길지도 모른다. 특히 직원이 장기 휴가를 간 경우도 많으며, 대체근무자가 있더라도 대신 마감처리는 하지 않으므로 그 기간만큼 자연히 뒤로 미뤄진다.
"한국의일처리가 너무 빠른것도 사실이지만, 여기는 사실 너무 느린 거 아니야?"라며 불평을 터뜨리기가 일쑤였다.
회사 첫 출근 날, 인사 담당자가 사전에 예약을 잡아 둔 주거래은행에 급여 계좌를 만들기 위해 지하철 네 정거장 거리의 지점으로 찾아갔다.
리셉션 남자는 기다리라며 오피스로 안내했고, 별도 은행원과 인터뷰를 했다. 계약서 사인, 각종 영문 증명서와 회사 보증서(Attestation)를 제출했는데도, 내 여권에 출생지가 없다는 이유로 출생지 증명서의 대사관 공증을 받아 오라는 것이다. 유일하게 한국 여권만 출생 도시가 적혀 있지 않다고들었다.
하지만, 유럽은 출생 연도뿐 아니라 출생 도시를 중요하게 여긴다. 우리 주벨기에 한국대사관은 역시 신속하게 처리해 주었고, 난 은행에 재방문했다.
일을 다 마쳤는데도 직불카드와 신용카드를 받는데 2주가 걸린다고 했다. 시간이 돼서 찾아갔는데, 직불카드만 지급해줄 뿐 신용카드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는 리셉션 남자의 말에 그럼 전화로 사후에 알려 달라고 했다.
하지만, 1주가 지나도록 연락이 없어 찾아갔더니 다른 직원이 그런 서비스는 안 한다며 직접 찾아와야 한다고 말한다. 담당자마다 말이 다른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난 그 이후로 결국 다섯 번을 더 방문해서 신용카드를 간신히 받았다. 나중에 이유를 듣고 나서 너무 황당했다.
'첫날 인터뷰 때 출생지가 서울이라고 구두로 답변했는데, 차후 출생지 증명서에는 부산이라고 되어 있어 내가 거짓말을 했기에 은행 본부의 범죄심사팀으로 내 정보를 넘겼고 그래서 오래 걸렸다.'
당시 벨기에 테러 사건(2016.3월)이 있은 지 4개월 남짓 지난 시점이라 은행권에서 기존보다까다롭게 심사했던 것이었다.
그리고첫 달 필요한 정착자금으로 이체시킨 돈을 아마도 테러자금으로 의심했나 보다.
심지어 내 지인은 국적을 'Korea'라고 은행에 말했더니 'North Korea'로 체크해서 역시 심사팀으로 넘어가 상당기간 애를 먹기도 했다.
이 외에도 환전을 하기 위해서는 4일 전 예약을 해야 은행 환전이 된다. 동사무소(꼬뮨)에서 운전면허증을 현지 면허증으로 교환하는데도 한 달 이상 걸렸다.
현지 주민등록증인 아이디카드를 발급받은 날은 가족 파티를 할 만큼 기쁜 날이다.
왜냐하면 이 카드가 나와야 차도 사고, 보험도 가입하는 등 중요한 여타 일을 처리하고 정착의 50프로가 완료되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카드 발급마저도 순수하게 6주 이상 걸린다.
보험금 환급도 한국은 3일 안에 처리되지만, 여기는 보험금 신청하고 잊힐 듯한 시간이 지나야 비로소 입금된다.
처음 6개월은 이 모든 것이 인종 차별 같은 느낌이 들어 이방인으로서 서운했으나, 현지인도 똑같이 대하는 걸 알고 오해가 풀렸다. 벨기에 행정이 개혁되기를 바라기보다 내 마음을 개조하는 게 더 빨랐다.
즉, 한국에서 처리됐던 빠른 속도를 당분간 잊어버리기로 했다. 내 초조함과 상관없이 결과는 언제나 같았으므로.... 독촉한다고 빨라지지 않았으며, 늦게 되는 것에 나 혼자만 얼굴이 불그락거리며 일희일비했을 뿐, 상대방은 아무 미안한 마음이나 표정이 없었다. 기분 나쁘게 윙크까지 하는 것은 여전하다.
좋게 말한다면 내 성격이 많은 일에 관대해졌다.
쉽게 흥분하지 않는 성격이 되어갔다.
차 운전도 양보와 여유의 미덕, 버거킹에서 줄 서 있어도 줄 선 사람과 대화하는 여유를 갖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