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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정은 Dec 15. 2019

열쇠를 찾으러 떠나요!

런던&아이

예정에도 없던 기차를 탔다,

딸아이는 신이 나서 창밖을 내다보며 알 수 없는 노래들을 흥얼거렸다. 아이는 아직 말을 잘 못하지만 간혹 기분이 좋으면 노래 가사를 지어서 음만 비슷하게 부른다. 그럴 때마다 노래를 같이 불러주면 자지러질 듯 좋아한다. '자식, 단순하기는.' 하며 비웃다가도 나를 보고 좋아하고 크게 반응해주는 건 아이밖에 없다는 걸 잘 알기에 늘 잘해줘야지, 오늘은 화내지 말아야지 결심만 수없이 한다. 단 몇 분도 못 갈 결심이지만 말이다.

 

기차가 워털루역에 도착할수록 마음이 초조했다.

'쟤를 도대체 어떻게 학교까지 데리고 가지?"

남편의 학교에 가는 길이었다. 아침에 급하게 드런센터(Children's Center)에 간다고 나오면서 집안에 열쇠를 두고 나왔다. 밖에서 1시간 정도 방황하다가 도저히 갈 곳이 없어 남편의 학교까지 열쇠를 받으러 가기로 한 것이다.

남편의 학교는 런던 시내에서도 가장 중심에 있기에 가는 과정이 만만치 않다. 한참 호기심 많은 아이가 화려한 런던 시내의 볼거리를 그냥 지나치지 않을 것이고, 나는 때로는 화를 내거나, 비굴하게 젤리를 들고 아이를 쫓아다니며 회유와 협박을 일삼아야 할 것이다.


드디어 워털루역에 도착했다. 아이는 역시 유모차에 안 탄다고 버틴다. 나는 한 손으로 아이의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론 유모차를 끌고 기차의 개찰구를 나선다. 심장이 두근두근하다. 수많은 인파 속에서 신이나 걷는 아이의 발걸음이 이상하게 빨라진다. '안돼!' 하는 순간 이미 아이는 달려 나가고 없다. 정신없이 아이를 쫓는다. 한낮의 추격전이 따로 없다.  '너 오늘 나한테 잡히면 죽는다!' 험한 말들이 오고 가지만 그보다 아이를 잃어버릴까, 심장이 덜컹거린다.

"찾았다, 요 녀석!"

워털루역 안에 있는 서점 앞에 서 있는 아이의 모습을 보니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가끔 워털루역에 오면 남편과 함께 아이를 데리고 아이의 스티커북을 사던 곳이다.

가만히 아이를 들여다본다.

"뭘 보고 있어?"

아이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한다.

"저기, 저기."

작년 크리스마스에 아이에게 선물한 그루팔로 인형이 진열 대위에 놓여있다. 집에 있던 인형이 보이니 반가웠던 모양이다. 아이가 나를 보며 씩 웃는다.

"엄마, 안아줘!"

나는 아이를 살포시 앉아 올렸다.

"사람들 많은 곳에서는 엄마 손을 꼭 잡아야 해, 엄마 잃어버리면 어떡해!"

아이도 긴장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킁킁 낯익은 냄새가 났다.  서둘러 아이의 기저귀를 살펴봤다.

응아였다. 엄마 말에 긴장한 것이 아니라 힘을 주고 있던 모양이었다.  가방엔 물티슈가 없다. 난감함의 연속이다. 일단 눈에 보이는 엠앤에스 M&S(Marks Spencer)로 들어갔다. 아무리 둘러봐도 물티슈가 보이지 않았다. 음료수나 물,  간식 혹은 간단한 끼니들로 가득 채워진 매장으로 보였다. 아이는 수많은 젤리 앞에 넉을 놓고 서 있었다. 혹시 하는 마음에 점원을 불러 물티슈가 어디에 있는지 물어봤다. 점원은 물티슈는 없다고 말하며 건너편의 부츠(Boots)를 가리켰다. 거기에는 있을 거라는 말이었다.

"엄마, 나 이거 사줘."

"기차에서도 젤리 먹었잖아, 이제 그만 먹어야 해. "

"싫어! 사줘!"

"우리 부츠에 물티슈 사러 가야 해."

아이도 물러설 기세가 아니었다. 젤리를 놓지 못하고 만지작거리며 고민에 빠진 거 같았다.

"엄만 갈 거야."

최후통첩이었다. 나는 서서히 발걸음을 떼며 걸었다. 그리고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고민에 빠지던 아이가 젤리를 제자리에 두고 따라나섰다.

서둘러 부츠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각가지 간식들이 입구에 가득했다. 가는 곳마다 아이의 발걸음을 잡는 것밖에 없었다. 하필 육아용품은 2층이라고 하니, 한숨이 나왔다.

아이는 이번엔 초콜릿을 하나 들고 따라오고 있었다. 화가 난 표정으로 쳐다보니 아이가 난감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먹고는 싶지만 엄마의 눈치가 보인 모양이었다.

"그래, 하나 가져와!"

아이가 신이 나서 들고 달려왔다.  2층에 올라가 서둘러 물티슈를 사서 화장실로 향했다.


"아유, 진짜.  뭐가 이래!"

화장실 앞에 서자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었다. 워털루역의 화장실은 공짜가 아니라는 거. 그것도 현금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운이 좋을 땐 공짜로 사용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그날이 아니라는 것에 심한 분노가 일어났다. 현금이 없던 나는 아이를 끌고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남편의 학교를 가기 위해선 다리를 건너가야 했다. 한 정거장 정도지만 날씨가 너무 춥고 바람이 많이 불어 버스를 이용하는 편이 나았다.

마음이 조급했다. 전에도 런던 시내에 나와서 기저귀 갈 때를 찾지 못해 아이가 요로감염에 걸린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아이를 데리고 다녀도 언제든 화장실이나 수유실을 찾아 사용하기 편했다. 그러나 영국은 그러지 않은 편이다. 대형 박물관 같은 곳에선 화장실이나 아이 기저귀 가는 곳도 있지만 다른 곳에선 찾기가 어렵다. 특히 수유실 같은 곳은 거의 없다. 처음엔 이해가 안 됐는데, 영국에 엄마들 대부분이 어디서든 아이가 원하면 수유를 하는 편이라 수유실이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아이를 24개월까지 수유하면서 나 또한 이제는 어디서든 수유를 하게 됐으니 말이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아이에게 젖을 물린다는 게 참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무리 엄마여도 여자가 아닌가? 여자로서 수치심, 그런 건 느끼지 않는 게 엄마인가 싶어서이다. 엄마이지만 여전히 여자이고 싶다. 하지만 아이를 키우면서 여자보단 엄마 일 때가 점점 더 많아지는 거 같다.


 화장실에서 기저귀를 갈자마자 남편에게 문자가 왔다. 세미나를 들어간다는 내용이었다. 한두 시간은 또 아이와 밖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다. 겨울이라 날씨가 너무 추웠다. 아이와 함께 학교 앞 스케이트장 옆 카페에 들어갔다. 카페 안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다른 곳으로 옮길까 하고 보니

아이가 카페의 창문에 달려있는 장식품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가만히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 귀를 기울인다. 낮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남녀 구분 없이 커피를 마시거나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 속, 나는 생각에 빠진다.

'나도 아이를 낳기 전에는 저 자리 어디쯤 앉아있었겠지.'


허리가 잘록하게 드러나는 드레스에 높은 하이힐을 신은 날씬한 그녀가 눈에 들어온다. 그녀가 말을 하자, 사람들이 환호한다. 그녀가 사람들을 보고 웃는다. 나도 모르게 그녀를 따라 웃는다.


"엄마, 배고파!"

정신이 번쩍 든다. 아이의 점심을 놓친 게 생각난다. 부랴부랴 아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간다.

어딘가로 또 사라지는 아이, 이번엔 비둘기다.


평소 비둘기를 좋아하는 아이는 비둘기를 보며 흥분한다. 비둘기를 잡겠다고 배고픈 것도 잊고 쫓아다니고 있다.

'어차피 시간도 많고 할 일도 없다, 마음껏 돌아다녀라.'

괜스레 여유가 생긴다. 주변을 둘러보니 화려하다.

생각해보니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었다. 아이를 끌고 오느라 미처 신경 쓰지 못했는데 눈 앞에 커다란 크리스마스트리가 눈에 들어온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서로 찍어주기 바쁘다.

'나도 찍고 싶다!'

속으로 되뇌어도 찍어줄 사람이 없다. 비둘기를 쫓아가는 아이를 따라나서며 마음속 생각들을 또다시 고이 접어둔다.

아이는 화려한 불빛들로 장식된 초콜릿 상점이 마음에 든 모양이다. 상점 앞 계단을 오른다. 나도 뒤를 따른다. 아이는 어쩐 일인지 초콜릿은 관심을 두지 않고 복도로 나선다.

"우와!"

아이가 탄성을 지른다.

나도 따라 나가 탄성을 지른다.

"우와!"

복도 전체가 하나의 트리가 같다. 아이도 나도 신기해하며 복도를 거닌다.

복도 중간쯤 아이가 멈춰서 한동안 트리에 매달린 방울들을 바라본다.

'아이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하루 종일 아이를 쫓느라 기진맥진 한 나도 한 편의 동화처럼 펼쳐진 복도 속 이야기에 젖어든다.


'이 복도 끝엔 어떤 이야기가 숨겨져 있을까. '

상상의 나레를 펼친다.

어린 시절 조앤 롤링 같은 동화 작가가 되고 싶다던 꿈 많던 나로 돌아간다. 동화의 주인공은 아이고 나는 작가가 된다.


"찾았다! 열쇠."

아이가 아빠의 손에 들린 열쇠를 보고 소리친다.

어느새 아이는 아빠의 품에 안겨 있다.


남편은 퇴근 준비를 마치고 학교 앞에 나와있었다.

아빠의 품에 안겨 가는 아이의 얼굴에 행복이 묻어있다.


'엄마도 오늘 하루 너 때문에 참 행복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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