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딸아이는 낮잠도 자지 않고 짜증을 너무낸다. 하루 종일 아이와 집안에서만 있자면 화를 억제하지 못하고 꼭 아이를 혼내고 만다. 그러다 아이가 흐느껴 잠이라도 들면 마음이 아프다. 혼내지 않고 키우고 싶은데, 잠만이라도 울며 잠들 게 하고 싶지 않는데, 늘 하기 싫은 일들을 아이에게만 하는 거 같아 속상하다.
아이를 데리고 밖에 나가자니 추운 날씨에 마땅히 갈 곳도 없다. 방학기간이라 도서관이나 플레이 그룹 같은 곳에서의 활동도 쉰다.
영국의 흐린 날씨와 함께 마음은 울적해지고 갈 곳 없는 우리 두 모녀는 창밖만 서성였다.
" 우리 오늘은 어디 갈까?"
"아빠한테 가자!"
"응? 아빠?"
아이는 지난번 열쇠를 찾으러 아빠의 학교에 다녀온 게 좋았던 모양이다.
후드둑 빗방울이 창밖으로 떨어졌다. 살짝 귀찮은 마음이 들었다.
"우리 가자아!"
아이가 재촉했다.
'그래, 가자! 하루 종일 집안에서 너와 싸울 바엔 차라리 비와 싸우겠어!'
대충 점심 도시락을 챙겨 아이와 완전무장하고 밖으로 나섰다. 순순히 유모차에 타 준 아이 덕분에 출발이 순조로웠다. 덜컹 거리는 기차 안, 스르륵 아이가 잠이 들었다.
'근데 진짜 어디 가지?'
일하고 있는 남편을 불러내긴 싫었다. 그래도 아이와의 약속을 지킬 겸 남편과는 퇴근 후 만나서 집에 갈 생각으로 학교 근처에 있는 장소들을 중심으로 떠올려보았다.
'런던아이? 내셔럴 갤러리? 코벤트 가든?'
머릿속에선 아이와 함께 했을 때의 장소와 더불어 벌어질 수 있는 경우의 수를 재차 떠올렸다.
런던아이는 예전에 아이를 태워줬을 때 좋아했다. 하지만 너무 비싸다. 한 번으로 족하다. 내셔럴 갤러리? 음 가볼만하다. 하지만 나중에 내셔럴 갤러리에서 아이들을 상대로 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해보기로 하고 일단 패스!
그래, 코벤트가든은 마켓이나 상점들이 많아 볼 게 많다. 아이와 마켓과 상점만 돌아도 오후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코벤트 가든에 도착해서도 아이는 잠들어있었다.
'얼마만의 자유시간인가! 집에서 이렇게 자주면 너무 좋을 텐데 아쉽다'
비가 그치자 코벤트 가든 광장 한편은 공연으로 사람들이 북적였다. 예전에 대학 다닐 때 대학로에 연극을 보러 갈 때면 길거리에 서서 사람들의 공연을 본 적이 있었다. 춤추는 사람, 노래 부르는 사람, 개그공연을 하는 사람들 다양한 사람들의 공연을 보면서 참 재밌다고 생각했었다.
지금도 대학로에 길거리 공연이 있을진 잘 모르겠다. 벌써 20년이 다 돼가는 이야기다.
아슬아슬한 젊은 남자 불쇼 공연을 뒤로하고 가든 안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렛 잇 고~레잇고오~"
누군가의 노랫소리에 멈춰 섰다. 겨울왕국 노래다. 반가움 마음에 내려다봤다.
식당 안에서 한 여자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마치 한 편의 공연을 보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질 정도로 여자는 열정적으로 노래를 불렀다. 식당 한편에 있는 계단을 오르내리며 약간의 동작과 함께 폭발적인 가창력으로 주변을 압도했다. 지나가던 사람들조차 난간을 붙잡고 내려다보며 여자의 공연에 빠져들고 있었다.
영국에 살면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뮤지컬 공연을 자주 보는 거였다. 때때로 런던에 있는 뮤지컬 공연장을 지날 때면 '언제쯤 저 공연장에 들어가 마음 편히 공연을 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영국에 살게 되면 언제든 공연장을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육아라는 장벽은 공연장의 문턱도 쉽게 넘어가지 못하게 하는 거 같다.
'여보, 주말엔 혼자 애 좀 봐!'
여자의 공연에 한창 빠져있을무렵 누군가 내 앞에 섰다. 여자의 공연에 기부를 할 거냐는 물음과 함께 바구니를 내밀었다. 나는 흔쾌히 주머니에서 1파운드를 꺼내 바구니에 넣었다. 1파운드보다 더 가치 있는 공연이었다. 몇몇 사람들은 여자의 CD도 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