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밤, 그녀가 창문 밖을 내다본다. 아침이 오면 그녀는 죽임을 당할 것이다. 그것도 한때는 자신을 누구보다 사랑하던남편 헨리 8세에게. 그녀는 무척이나 담담하다. 그녀의 죽음이 자신의 딸에게 새로운 미래의 약속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녀는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결국 날이 밝고 그녀는 사형을 당한다. 여기까지가 앤 블린의 이야기다.
4년 전 타워브리지를 건너면서 다리 건너 보이는 성에 대한 관심이 생겼었다. 도대체 저 성은 누가 살던 곳일까에서 시작된 궁금증은 앤 블린이라는 왕비에 대한 관심으로까지 이어졌다.
누구보다 당돌해서 죽음을 당한 여자, 끝까지 왕의 여자로 살아가길 바랬고, 한 아이의 어머니로서의 삶을 마감하면서도 아이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았던 여자이기에 더 마음이 쓰였는지도 모르겠다.
과연 나는 어떤 엄마일까.
주말 낮 점심을 서둘러 먹고 아이의 간식으로 찐 고구마를 챙겨 런던탑(The Towor of London) 구경을 갔다. 아이를 데리고 갈 때가 마땅치 않아 간 곳인데 생각보다 신나 하는 아이를 보니 기분이 좋았다. 영국에 살면서 가장 좋은 점 하나는 런던탑과 같은 중세시대의 건축물들을 아무 때나 마음만 먹으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런던탑의 벽을 유심이 바라보는 아이
그런 의미로 영국에 사는 동안은 아이에게 영국의 문화를 많이 보여주고 느끼게 해주는 엄마가 되고 싶다. 여러 여건들이 따라 줘야 하지만 아이에게만큼은 다른 나라의 문화를 책으로만 가르치고 싶진 않다. 교육적인 지식들로 남들보다 뛰어난 아이로 키우기보단 보고 듣고 만져보고 때론 느껴보며 다양한 경험들로 삶의 지혜가 있는 아이로 자라났으면 좋겠다.
사실 나는 런던탑이 두 번째 방문이었다. 지난번에는 퇴장시간에 쫓겨 크라운 주얼스(Crown Jewels)를 보지 못해 아쉬움이 컸었다. 그래서 이번엔 꼭 보겠다는 마음속 계획도 하나 있었다.
런던탑에는 중세시대의 의상을 입은 배우들이 자주 돌아다닌다.
"아니, 이게 뭐지?"
아이의 눈에도 사람들의 옷이 이상하게 느껴졌나 보다. 남편이 아이의 옆에서 사람들의 의상에 대해 열심히 설명해줬다. 아이는 아는지 모르는지 아리송한 표정을 짓더니 씩 웃고는 달려 나갔다. 아이를 쫓아 남편과 나도 달렸다. 아이가 순간 또 멈춰 섰다. 이번엔 까마귀였다. 새를 좋아하는 아이가 그냥 지나칠리 없었다.
아이는 탑 안에 제 집까지 가지고 있는 까마귀가 신기한지 가까이에서 보려고 남편에게 목마를 태워달랬다.
런던탑에서 까마귀를 키운다는 얘기는 들었었는데 눈으로 확인하니 더 신기했다. 영국에선 찰리 2세 때부터 까마귀를 성스러운 존재로 여겨 런던탑에서 키우고 있다. 까마귀만 담당하는 사육사가 있을 만큼 지금은 런던탑의 명물이 되었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아이는 계속 까마귀 곁을 떠나고 싶어 하지 않고, 내 마음은 크라운 주얼스로 향했다. 몇 걸음만 더 모퉁이만 돌면 될 거 같은데, 아이는 까마귀만 쫓아다니느라 신이나 있었다. 또다시 런던탑에 오긴 돈과 시간이 너무 많이 들었다. 왕관 하나만 보고 가면 될 거 같은데 아이는 내 맘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에라 모르겠다!'
"여보, 애 좀 봐. 나 저기 가서 왕관 하나만 보고 올게. 응?"
"근데, 여보!"
남편이 망설이며 말을 이었다.
"나, 배 아파. 아까부터 참고 있었는데 이젠 진짜 화장실 가야겠어!"
'아이고, 웬수!'
남편은 서둘러 나와 아이를 두고 화장실로 달려갔다. 남편이 돌아오고 퇴장시간까지 10분이 남았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출입구 쪽을 향해 나갔다. 황망한 표정으로 나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남편이 말했다.
"이젠 어떡하지?"
"어떡하긴 어떡하겠냐, 이젠 집으로 가야지."
'아, 아이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던 내 마음속 앤 블린은 도대체 어디로 갔단 말이냐!'
아이에게 좋은 경험과 행복을 주기 위한 목적을 달성했음에도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 없다. 여전히 나는 엄마지만 하고 싶은 게 많다.
침울해진 마음에 남편과 아이를 뒤로 하고 한 발짝 앞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 슬쩍 뒤를 돌아보니 아이와 남편은 뒤에서 엄마 화났다며 웃으며 속닥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