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모델? 그걸 누가? 우리 딸이...?"
한참을 배꼽을 잡고 낄낄거렸다. 작년 이맘때 남편은 딸아이를 영국에 있는 동안 모델을 시켜보고 싶다고 했다. 웬 황당무계한 일이냐고 반문했지만 딸바보 남편은 그저 제 딸을 가장 사랑스럽게 생각했기에 가능할 것이라 여겼다.
남편은 모델 에이전시 여러 곳에 지원서를 제출했다.
내 마음속 한 구석에도 '그래도 혹시나?'라는 생각이 있었으나,
역시 그 생각조차 부끄럽게도 연락 오는 곳은 없었다. 그리고는 한동안 잊고 지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생각이 다시 떠올랐다. 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와 둘이서만 보내는 하루는 너무 길었고 일주일은 더욱 길었다. 우리에겐 놀 거리가 하나라도 더 필요했다. 다른 새로운 사람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된다면, 어쩌면 예측하지 못할 더 재밌는 경험이 될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얼마 전 남편이 큰 기대 없이 한 에이전시에 지원서를 내었는데 인터뷰를 보러 오라고 메일이 온 것이다. 마음이 들떴다. 아이에게 어떤 옷을 입힐까 아이는 카메라 앞에서 잘 해낼 수 있을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이에게 이것저것 입혀놓고 카메라 앞에 세워 보았다. 하지만 아이는 대체 엄마가 대체 왜 이러는지 귀찮아했고 카메라엔 관심도 없었다.
기다리던 인터뷰 당일 아침이 되었다.
그런데 남편과 나는 정작 아이는 제쳐두고 경쟁하듯 우리를 꾸미기 시작했다.
남편이 거울 앞에 섰다.
"이 옷 너무 구겨진 거 같지 않아?"
남편이 입고 있던 옷을 벗고 다른 옷으로 갈아입었다.
"오빠, 난 앞머리 좀 자를까? 기니깐 좀 답답해 보일 거야, 그렇지?"
"괜찮은 거 같은데, 알아서 해."
남편은 어젯밤 아이를 재우고 있는 나를 두고 화장실에서 머리카락을 자른 모양이었다. 괜히 약이 올랐다.
'난 어젯밤에 팩도 하나 못 붙였는데.'
"엄마!"
아이는 아직 내복 바람에 초콜릿을 입에 덕지덕지 묻힌 채 나를 올려다보며 웃고 있었다.
"어머!"
급하게 아이를 준비시켜서 집을 나섰다.
아이는 어딜 가는지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외출이 신이 나서 히히거리며 웃어댔다.
남편은 가는 내내 쇼윈도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체크했다. 남편을 따라 나도 쇼윈도의 내 모습을 바라봤다.
살이 쪄 동글동글해진 얼굴과 축 쳐진 뱃살이 눈에 들어왔다. '언제 이렇게 살이 쪘냐.'
가는 도중 잠든 아이를 끌고 겨우 약속시간에 맞춰 스튜디오에 도착했다. 일주일에 200명이 지원을 한다더니, 우리 앞으로도 여러 명이 사진을 촬영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누가 촬영하는 거니?"
직원이 남편에 물었다. 남편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여기, 우리 아이야."
아이를 깨웠다. 잠이 덜 깨 비몽사몽이던 아이의 옷을 재빠르게 갈아입혔다. 그 뒤 남편이 아이를 안고 사진 촬영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줬다.
드디어 아이의 촬영이 시작됐다. 카메라 앞에 선 아이는 표정이 어리둥절했다. 등줄기에 땀이 흘렀다.
사진작가는 아이에게 앉고 서는 포즈를 취하게 했다. 아이는 예상과 다르게 사진작가가 시키는 대로 포즈를 취했지만 표정은 여전히 뚱했다. 끝날 때까지 미소 한 번을 보여주지 않았다.
'역시, 망했어!'
촬영이 끝나고 인터뷰를 진행하던 매니저가 말했다.
"아이가 참 예쁘다. 정말 마음에 들어!"
"오, 진짜?!"
딸 바보 남편은 그저 좋아서 헤실거렸다. 일주일 후 연락을 주겠다고 말하며 인터뷰는 끝이 났다.
아이는 이제야 적응이 되었는지 미소를 지으며 스튜디오 안을 돌아다녔다.
집으로 가는 길 내내 남편은 여전히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오빠, 오빠는 왜 자꾸 거울을 보는 거야? 오빠도 모델하고 싶었어?"
오는 내내 쇼윈도에 자신을 비춰 보던 남편이 웃겨서 한 말이었다.
"아까, 그 말 못 들었어. 나 보면서 누가 사진 찍을 거냐고 물어본 거? 그러는 너는? 왜 그렇게 입고 온 건데?"
중학교 1학년 때 나의 꿈은 슈퍼모델이었다.
어린 내 마음에도 런웨이를 걸어가는 모델들이 참 멋있다 싶었다. 그 당시 나는 또래에 비해 키가 컸었다. 그러나 더 이상 키가 크지 않았다. ㅠㅠ
아이 덕분에 문득 지나간 내 꿈이 떠올랐다.
"그냥!"
새침하게 돌아서는 나를 보고 남편이 웃었다. 나도 남편을 따라 웃었다.
아이가 유모차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엄마, 아이스크림 사주세요!"
촬영 전 남편과 나는 아이에게 아이스크림을 사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래, 가자 아이스크림 먹으러!"
남편의 말에 아이가 엉덩이 들썩거리며 좋아했다.
나도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멋지게 걸어본다.
'그래, 나도 이참에 다이어트 한번 해볼까. 지금도 늦지 않았을 수 있어.'
스쳐 지나가는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