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스와 코로나

열대 우림의 시점

by 익소라


2003년은 싱가포르에 처음 와서 둥지를 튼 해이다. 덥고 습하다는 사전 지식대로 날씨는 그야말로 고온다습했다. 잠깐 외출을 하고 와도 아이들의 옷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땀구멍이 막혔던 내 몸도 수문을 급속도로 열기 시작했다. 가급적이면 외출을 삼가고 실내에서 에어컨을 켜고 지냈다. 한국의 겨울에 문을 닫고 보일러를 켜듯이 여기서는 시원한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 문을 닫는다. 2001년에 호주로 처음 이주를 했을 때보다 정착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나마 수영장이 있어서 아이들의 놀이터로는 훌륭했고 국민들 대부분도 동양인이라 친근감이 들었다. 어딜 가나 열대우림은 울창했고 사람들의 구역에는 잘 가꿔진 정원이 아름다웠다. 덕분에 하루하루 힘을 얻어가며 새살림을 꾸려가기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사스(SARS)가 창궐했다. 모기에 물린 다리가 2차 감염이 되어 병원에 갔을 때 환자들이 모두 병원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모임이 금지되었다. 택시를 타면 운전사는 승객을 살피고 승객은 운전사를 경계했다. 한국 요리를 위한 식재료를 구하기도 어려운 때였다. 콩나물을 사기 위해 새벽 재래시장으로 가야 했다. 싱가포르 로컬 음식은 같은 동양인데도 잘 맞지가 않았다. 오히려 해외살이를 처음 했던 호주에서는 식재료가 풍부했다. 이미 한국에 있을 때 서양요리를 많이 접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빵부터 파스타까지 원조의 맛을 볼 수 있고 곁들인 블래 커피와의 조화를 즐겼었다. 싱가포르에서는 남편도 직장생활이 쉽지 않았는지 1년만 버티고 우리는 귀국길에 올랐다. 떠오르는 비행기의 창 밖으로 군집하고 있는 정글이 내려다 보였다. 그 숲은 정말 두고 가기가 아쉬웠다. 여행으로라도 다시 올 수 있을까 하며 시선을 거두었다.


우리 가족은 2007년에 다시 싱가포르로 이주를 하게 되었다. 이렇듯 남편의 직장은 나머지 식구들의 환경을 요리조리 바꾸었다. 남편도 재적응을 해야 했지만 이제 학교를 다녀야 하는 아이들은 좀 더 큰 시련에 맞닥뜨린 셈이다. 열대우림 속에서 길을 내며 걷는 듯했다. 큰 아이는 6학년에 바로 들어갈 수 없어서 일 년을 낮춰 5학년으로 현지 학교에 입학을 했다. 동생들과 학교를 다녀야 하는 심정이 어려웠지만 따라준 것이 고마웠다. 나이가 꽤나 중요 관심사인 한국에서 싱가포르로 시점이 넘어오자 우리 안의 고정관념도 서서히 변했다. 나이가 달라도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몸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2020년 코로나가 발발했다. 싱가포르에서 이제는 적응을 하며 지낼만한데 코로나가 엄습한 것이다. 사스를 겪었던 싱가포르는 통제와 감시가 철저하다. 규칙을 따르지 않는 사람에게 가차 없이 벌금을 물렸다. 모든 식당 내에서의 식사가 금지되고 포장만 허용되기도 했다. 남의 집 방문이 금지될 때도 있고 모든 운동시설과 유흥업소가 문을 닫았다. 지금은 쉽게 귀국을 결정할 수 있는 시기가 아니다. 이 열대우림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웬만큼 익힌 시점이기도 하지만 전 세계의 상황이 비슷하다. 타국에 있다기보다는 하나의 지구에서 동시대를 살아가는 시대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