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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룬 Jan 16. 2024

#17. 만화경

기념품으로 기념하기

★★★

 3시 35분을 막 넘어섰군요







   만화경은 장난감이다.

거울이 맞붙은 통에 색종이나 작은 조각들을 넣어 움직일 때마다 달라지는 모양을 즐길 수 있는. 이 만화경은 색종이나 조각 대신 한쪽 끝에 반대편을 볼 수 있는 렌즈가 달려있다. 만화경을 향하는 곳에 따라 보이는 색과 모양이 쉴 새 없이 달라진다. 창 밖의 나무가 먼지깨비가 되고, 책상 위의 연필이 별이 되며.


   어디서 샀는가 하면, 강원도 삼척에 있는 이국적인 분위기의 리조트 1층의 디자인샵에서다. 체크인 순서를 기다리며 로비에 있던 기프트샵이나 둘러보러 들어갔다가 유럽 어디서 왔다는 고운 장난감들이 발길을 잡아끌었고,  샵의 주인은 환영 인사를 하기도 전에 매출을 올렸다. 집을 나서기만 하면 들뜨는 마음이라니. 

   

   놀러 나가는 길을 마다할 이가 있을까 싶지만, 아이들과 나서는 나들이는 만만치 않다. 느리게 이동하고 거르지 않고 먹고, 입장료를 지불하고 뭐라도 먹고, 한참을 놀다가 또 먹고, 마신다. 작은 사람들과의 외출에서 필요한 시공간의 크기는 어른들끼리 놀 때와는 차원이 다르다. 사람 수에 비례하기보다 오히려 제곱 이상의 에너지가 드는 기분이랄까. 

   그런데 마트 2층에 있는 장난감 가게, 미술관 출구에 있는 아트샵, 동물원 곳곳의 기프트 샵들은 그곳을 지나지 않고는 빠져나갈 수 없는 동선에 있다. 머나먼 여정의 끝임을 알지만, 끝날 때까지 끝이 아닌 시간의 시작. 아이 손에 기념품 같은 걸 얼른 하나 들려주고 관심이 식기 전에 귀가하거나, 지갑도 나의 에너지도 남은 게 하나 없어 기념품까지 살 수는 없으니 경직된 채 돌아서거나 둘 중 하나다. 


   나의 부모님은 후자인 경우가 많았고 어린 나는 빈손으로 집에 오는 일이 익숙했다. 그랬지만 어렸을 때의 나는 그런 것들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아이이기도 했다.  

동물원에서 만난 코끼리를 닮은 인형, 처음 본 그림을 담아둔 엽서, 장소의 이름을 새겨 만든 연필, 작품으로 만들어진 스티커 같은 것들이 그렇게나 갖고 싶었다. 그저 간절함 만으로 채워진 어린 마음들은 쉽게 닳지 않아 어른이 되어서도 그런 걸 갖고 싶어 했다. 갖고 싶었지만 여전히 사지 못했는데, 동물원의 인형은 다 큰 어른이 들고 다니기엔 너무 귀여워 어울리지 않은 듯 보였고, 소소한 소품들을 두고는 (그렇게나 예쁜 아이들 앞에서) 일부러 쓸모부터 따지곤 했다. 해보지 않은 일들이 자라는 동안 하면 안 되는 일이 되어 있었다.


   내가 이룬 가족이 셋이 되고, 아이가 걷게 되었을 때 우리는 드디어 에버랜드로 갔다.

인생 첫 에버랜드, 꿈과 희망이 가득한 하루를 위해 특별한 프로그램을 신청했다. 공식 오픈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일찍 입장해, 물과 땅을 넘나들며 사파리를 돌고, 기린에게 밥도 주고 동물들과 사진을 찍은 뒤 지정된 식당에서 식사하고 기념품 샵에서 귀여운 인형과 머리띠를 골라 노란 가방에 담아 나오는 엄청난 프로그램. 아이의 작은 얼굴이 환호와 감탄으로 가득했고, 그이와 나의 얼굴도 그랬다. 모든 순간이 그림책 속 장면 같던 여정은 아이가 오른손에 백호, 왼손에 사막여우를 들고 기념품샵을 나서며 마무리되었다. 집으로 오는 길은 교통 체증이 심했지만, 인형들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많은 덕분에 지루하지 않았다. 침대 머리에 기꺼이 자리를 내어주었던 백호와 사막여우는 여전히 우리 집에 있다. 그날, 참 재밌었어 그지? 아이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줘. 대신 내가 머리 위로 먼지가 쌓이게 하진 않을게. 같은 길을 돌아왔으니 그런 말들은 혼잣말이 아니다.


   고삐가 풀린, 아니지 새 시대가 열렸다.

아이와의 나들이가 잦아지면서, 추억을 보관할 곳이 필요했고 하나씩 사들고 왔다. 전시 도록은 전용 책꽂이 칸에 고이 꽂아둔다. 젊은 예술가가 만든 종이 모빌을 창가에 걸어두고 바람 부는 날이면 창문을 연다. 해양 전시관에서 데려온 소리 나는 돌고래 열쇠고리를 누르면 돌고래 소리가 나는데, 아이는 그 소리에 웃고 우리는 아이 소리에 웃는다. 동물원에서 사 온 동물을 닮지 않은 바퀴 달린 타요 풍선은 바람이 다 꺼질 때까지 산책 친구였다. 여행지의 작은 서점에 들어가 책을 사고, 계산대 앞에 놓인 연필도 한 자루씩 담아와 새 학기가 시작할 때면 기념으로 꺼내 쓴다. 체험 가게에서 만들어 온 에코백은 길이 잘 들어 그이가 가장 좋아하는 가방이 되었고. 어딜 가도 냉장고 자석은 영 별로지만, 장면을 포착한 엽서만큼은  한 장씩 사서 나온다. 한 번의 나들이에 하나의 물건, 고르는 일마저도 즐겁다.   

   구경을 실컷 하고도 마음에 드는 게 없으면 그냥 나오는 날도 많다. 이젠 그런 날도, 아닌 날도 있는 것이다. 더 이상 기념품 샵 앞에다 아쉬운 감정을 남겨두지 않는다.  물건으로 마음을 채울 수 없지만, 마음에 든 물건을 징검다리 삼고 건너 그렇게 한 번씩 어린 나에게 선물을 건넨다. 동시에 현재의 우리 아이도 실컷 신나고.  


  그날의 아트샵은 고운 장난감이 너무 많아, 고르기 쉽지 않았다.

나는 만화경을, 아이는 나무 팽이를 들고 사고 싶어 했다. 우리는 팽팽했고, 누구 하나 지지 않을 것이라는 걸 눈치챈, 여행지의 들뜬 마음이 가장 컸던 그이가 카드를 내밀며 상황은 아름답게 마무리되었다. 


   내 고운 장난감, 만화경을 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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