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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룬 Dec 26. 2023

#15. 북마크

닳아 닮은 시간의 증거로

★★★

오래된 반짝임이네요.




⠀⠀⠀⠀⠀⠀⠀⠀⠀⠀⠀⠀⠀⠀⠀⠀⠀


⠀⠀⠀⠀⠀⠀⠀⠀⠀⠀⠀⠀⠀⠀⠀⠀

  이런 마지막 장면이라면.


  집 밖의 더위 때문에 창문을 꼭꼭 닫는 계절보다, 가끔은 창을 열어 일부러 찬 바람을 불러들이는 계절이 좋겠다. 자외선으로 눈이 부신 낮보다는 빛이 번지더라도 밤이 나을 것 같고. 통창너머로 숲이 보이고 집 안에는 장작을 태운 난로의 온기가 가득한 1층 집이 느낌상 딱이지만, 혹시라도 혼자면 너무 무서울 것 같으니 그냥 건너 집의 조명이 새어드는 익숙한 도심의 주택가로 해야 할 듯싶다. 침대 위에 누워있기보다는 다리를 뻗을 수 있는 의자에 반쯤 기대어 앉아 있기를. 손목이 상하는 줄도 모르고 몇 달을 걸려 만든 블랭킷이 여지없이 무릎에 덮여있을 것이다. 코에 걸친 안경은 콧대에 안경 자국을 남기지 않는 뿔테로, 예쁘진 않지만 그러길 잘했다.

   손에는 책이 들려있다. 그 책은 벌써 일곱 번째 읽고 있는 소설이며, 이번에도 역시 지난번에 읽을 때처럼 주인공 때문에 흥분해서, 나 역시 꼭 같이 마음이 아려 멈춰 선 것이다. 그리고 그 멈춰 선 자리에 걸린 책갈피. 달랑 거림이 서서히 잦아들 때쯤, 나도 고요해지길.  

   그 책갈피가 바로 그림 속 물건이다.


   책갈피는 프라하에서 왔다.

유명한 다리를 건너며 낭만을 딛고 걸어 거대하고 어두운 성으로 올랐다. 이내 성의 웅장함에 기가 눌려 절로 숙연해졌다. 잰걸음으로 큰 성을 한 바퀴 돌고 서둘러 빠져 나가는데, 출구 직전 골목에 작은 기념품 가게가 더 작은 문을 열고 그보다 더 작은 물건들을 내밀며 관광객들을 불러들였다.

   그럼 그렇지. 하고 못 이기는 척 들어간 나는 위대한 건축 유산에 압도당한 이가 아니라 작은 물건이 주는 손끝 감각에 홀딱 넘어간, 알고 보니 기념품 애호가였다. 혹시라도 다른 나라에서 만든 건 아닌지 생산지가 체코가 분명한지 확인하면서 작은 가게를 함께 빠져나갈 물건을 고르느라, 다리에서 보낸 시간보다 성을 돌며 보낸 시간보다 더 오래 거기에 머물렀다.


   이 책갈피를 만진 순간!  (매장 내 샘플을 만져본 것이었기에 정확히 바로 이 물건은 아니지만.) 나의 유품은 이것이겠구나 싶었다.

   어째서 태어나 처음으로 낯선 땅의 기념품 가게에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때문에 내가 떠올린 삶의 끝 장면이 거의 평생을 살아온 아파트이기보다, 그날의 작은 가게를 닮은 통창이 있는 집인가도 싶다. 난로의 온기까지 있어야 제대로라 생각하는가 싶다. 난로 위에 주전자도 있었는데…

   고대하던 첫 유럽 여행 중이었다. 발이 아프도록 설렘과 환희 속을 종일 걷던 중이었는데, 심지어 아직 어리던 그때 삶의 끝을 떠올리게 될 줄이야.

   하긴 반복되는 일상에서는 죽음을 떠올릴 여유가 없다. 사는 동안은 분주해 틈이 없는 편이 더 나은지도 모르겠고. 적어도 죽음은 새롭고 낯선 일이니, 여기보다 거기가 어울리는 것도 같다.  


   한 사람의 삶이 지고 나면 유형의 것들은 주인을 잃고 의미를 잃는다. 누군가의 기억 속이 아니고서는 세상에 남을 방법이 없다. 어른이 된 이후 몇 번의 장례를 겪으며 매번 깨닫는다. 그럼에도, 특정 물건에 기대어 (재산이 아니라 물건이다) 나에 대한 기억을 연장하거나 포장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욕심이 들기도 한다. 아마도 아이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좀 더 남고 싶음도 살아있는 동안의 바람일 테지만.  그렇다면 물건이 작을수록 짐이 덜 될 테니, 아무래도 책갈피만 한 게 없다. 사용하는 곳이 책장 사이니까, 물건의 주인을 한 번씩 떠올리는 자리는 책 근처가 될 테고, 그렇게 된다면 나로선 더 바랄 것이 없다.

   

   한 번씩 종이를 접어 만들어 쓰기도 하고,  책을 상하게 하지 않는 정도라면 엽서나 사진으로도 충분하니까 책갈피를 자주 사모으진 않는다. 좋아하는 물건이라기 무색하게 가진 수가 적어 희소성까지 충족시키니, 유품으로는 더욱 제격이다.


   무게가 나가기도 하고 잘 간직하겠다고 실제로 많이 사용하지 않았는데, 이제 그만 아끼고 길을 좀 들여야겠다. 빈티지 느낌을 내는 물건이 아니라, 실제로도 닳아가며 나를 닮도록 말이다.


  이십 년이 된 물건, 앞으로 이십 년은 더 볼 수 있길.

  미래 정해둔 나의 유품을 그려보았다.     


⠀⠀⠀⠀⠀⠀⠀⠀⠀⠀⠀⠀⠀⠀⠀⠀⠀


⠀⠀⠀⠀⠀⠀⠀⠀

(나는 책갈피라, 물건이 온 곳에서는 북마크라 부르니 제목과 내용의 표현이 다른데 모두 이 물건의 명칭이니 상관 않고 쓰고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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