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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룬 Dec 18. 2023

#13. 지우개

빛을 그리는 도구


★★★★
원근법 공부를 조금 더 하시오






 빛이 없을 땐, 어떤 사물도 제 모습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

때문에 어두울 때면  눈앞 대상의 정체를 밝히는데 시간이 걸린다. 시력이 약하다면 시간을 조금 더 들여야 한다. 놓치고 싶지 않은 장면에서 카메라를 켜면, 조명부터 환히 밝히고 포커스 창에서도 밝기를 최대한으로 올려본다. 퍼지는 빛이 아까워 하얀 종이를 바닥에 깔기도 한다. 그렇게 주변의 빛을 모아 한 곳을 채우고 나면, 모습이 드러난 대상의 보고 싶던 모습을 보게 된다. 원하던 순간을 포착한다.


 그림을 배우려고 화실에 잠시 다닌 적이 있다. 멀미가 나도록 선을 긋다가 빛을 보는 법을 막 시작할 즈음에 다른 일로 대차게 혼쭐이 나고는 그만두었다. 혼자서 그리기를 시작하고, 한계를 실감하며 멈춰 섰던 순간은 물건에 빛이 닿은 자리를 표현할 때였다. 선생님의 혼쭐을 한 달만 더 참았으면 고민을 덜었으려나.

앱으로 그리고 있지만, 빛을 다루는 법이나 빛을 발견하는 법은 인앱 툴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그냥 하는 수밖에.


 흰색을 덧칠하거나, 아예 얇은 연필 선을 그어두고 다른 색이 넘어가지 않도록 손을 부들부들 떨며 색칠을 했다. 여기까지는 빛이니까, 라며 정해두고서. 다행히도 어설프고 어색한 그림을 여러 장 그리고 나서야 나만의 방법을 찾았다. 빛을 그리려면, 빛이 닿은 자리를 지워내야 한다!는 궁극의 진리를 발견한 것이다.

 

 그리기 앱 안에는 여러 종류의 지우개가 있고, 각 지우개의 굵기와 투명도의 조합을 달리하면 만개의 빛 표현이 생기는 것과 같았다. 딱딱하고 납작했던 그림에서 색을 지우면서, 그러니까 빛을 구해내면서, 결과물이 눈앞에 보이는 물건과 제법 비슷해졌다.

캐시미어, 질감 있는, 부드러운, 테이퍼 형 등 이름도 다양한 지우개들은 쓱쓱 그림 속을 다니며 부지런히 빛을 찾아냈다. 선명하고 또렷하게, 때론 뭉근하고 은은하게 빛을 그려냈다.


 빛이 없으면 어떤 것도 볼 수 없는 현실의 한 장면을 그림 속 세상으로 옮기려면, 지워낼 줄 알아야 한다. 자꾸 칠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말이다. 그래야 빛이 나니까.

지워냄으로 표현해 낸다니, 왠지 진정한 예술가가 된 기분이다.


앞선' #09. 네 시간 향초'의 가장 뜨겁고 밝은 자리는  '각진 지우개'의 솜씨다. 그 공을 높이 사며, 필통에서 가장 각이 잡혀있던 지우개를 골라 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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