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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룬 Jan 23. 2024

#18. 청첩장

조금은 어색한 그라데이션

★★★






   집안 정리를 하던 날, 청첩장 한 뭉치가 발견되었다.

그이와 나의 이름, 부모님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데다 유일한 날을 위해 특별하게 제작된 물건이라 지난 시절의 사진만큼이나 버리기가 어려운 물건이었다. 반복되는 정보가 더 이상 쓸모없는데도 차마 버리지 못한 채 눈에 띌 때마다 화장대 선반의 맨 위칸으로 올려두었는데, 이렇게나 많이 남았다.

 

   매우 진지한 그러데이션에 잔잔하고 사랑스러운 느낌을 대놓고 보여주는 꽃 그림자. 파스텔 톤과 꽃 모양이 점령한 샤방샤방한 청첩장. 우리의 청첩장이 맞나 재차 확인하게 만드는 다른 세계의 느낌이다. 무채색이 당연하고, 꽃은 멀리서만 보는 나인데 이것이 나의 청첩장이라니. 만나는 사람마다 '신부님'을 불러대니 성당으로 가야 하나 주춤거리던 그 시절, 나의 감성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심지어 '같은 생각, 같은 느낌으로 행복하게 살겠다'니. 이 금빛으로 박힌 문장이 매 순간 치열했던 결혼 준비와 동떨어져 저 혼자만 한가로운 소리를 하고 있었다니. 마치 결혼식 당일만 살 것처럼 말이다.


   물론 우리도 그랬다. 부부의 연을 맺고 함께라는 이유가 더해졌으니 이전보다 조금 더 행복하기를, 신혼부부다운 사랑스러운 바람을 가지고 출발했다. 청첩장에 새겨진 날을 건넌 이후로 우리는 틈틈이 행복했고 행복하다. 하지만 그이와 내가 느끼는 행복의 크기와 빛깔, 발생 순간과 강도는 서로에게 전혀 다를 것이다. 엇비슷하게 웃을 수 있으나 꼭 같은 순간에 박장대소할 수는 없는 것처럼 미묘한 차이가 있을 것이다.

   

   공동의 시공간을 꾸려내며 익숙함을 공유한다. 같은 음식을 나눠먹고 같은 장소에서 일상을 일구다 보니 서로의 모습을 닮아가기도 한다. 하루를 마치고 자기 전에 씻던 그이는 이제 나처럼 귀가하자마자 씻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고, 집순이인 나는 온갖 잡무를 묶어 들고 한 번의 외출에 다 해결하고 들어와야 했지만 그이가 그렇듯 더 이상 집 밖을 드나드는 일이 '일'이 아닌게 되어 고작 음식쓰레기를 버리는 하나의 임무만 가지고도 현관을 나서게 되었다. 언제인지 모르게 달라진 모습들은 닮아버린 모습이다. 꽤 괜찮다.  

   그러다, 문득 한 번씩 낯섦이 찾아온다. 그 순간에 내 몸을 지키던 감정과 상태에 따라 상대에 대한 낯섦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신선한 느낌이기도, 긴 권태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렇게 한 번씩, 그이가 내가 아님을 자각한다. 내 마음도 내가 어쩌지 못하는데, 다 큰 어른의 저 마음을 어쩔 수 없지 하고 돌아선다. 잠시 잊고 있던, 전혀 다른 우리를 실감한다. 서운함도 아쉬움도 속상함도 지나가고 나면, 다시 괜찮아진다.


   다른 두 사람이 만나 서로를 닮아가다 점점 같아지는 건 거짓이다. 끊임없이 발견되는 다른 점을 극복하거나, 포기하거나, 어쩌면 닮아가기도 할 뿐이다. 매우 가까이에 있는, 나와 전혀 다른 세계를 하나씩 알아가는 일은 귀찮지만 피할 수 없는 수련이며, 강도 높은 연속적인 훈련이다. 일상에서 소소하게 깨달아버린 다름을 인정하고야 비로소 뒤따르는 것이 결혼 생활의 행복이다. 소소하고, 짧게 스치며, 되게 강력하지 않지만 덕분에 함께 자고 아침을 맞을 수 있는 힘이 되는 그런 행복. 그런 순간들은 우리의 마지막까지 있을 것이다.


   어쩌면 신부님 시절의 나는 꽃도 파스텔 톤도 다 이해하던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소량으로 직접 만들고 싶었는데, 수백 장이 필요하다는 어른들의 요청에 가장 전형적인 디자인을 골라버렸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어떤 식으로든 행복도 다짐하고 축복도 받고 싶었던지도 모른다. 여전히 모르는 것투성이고, 돌아서면 새로 알게 되는 일이 생겨나는데, 훨씬 더 막연하고 막막하던 결혼 준비생이었으니 같은 생각 같은 느낌이라면 진짜 행복을 부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지도. 그렇게라도 뛰어들고 싶었는지 모른다.


   샘플을 늘어놓고 최종 결정을 내리던 그 신부님을 다시 만나고 싶다.

파스텔보다는 무채색이 낫지 않을까 참견하고 30장 정도는 덜 주문하라고도, 둘이 많이 달라도 그래서 더 행복할 수 있으니 안심하라고 얘기해주고 싶다.  


   한 장만 남겨두고, 나머지 뭉치는 캠핑 가서 장작이랑 같이 태우기로 했다. 다시 화장대 위로 올리기 전에 유일한 우리의 청첩장을 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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