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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룬 Jan 30. 2024

#19. 머그컵

까만 컵에 담기는 까만 커피

하트를 찾아보시오

★ ★★★






⠀⠀⠀⠀⠀⠀⠀⠀⠀⠀⠀⠀⠀⠀⠀⠀⠀


   까만 컵에 까만 커피를 담았다.

   베이지색과 갈색이 뒤섞인 크레마가 아래쪽으로 먼저 내려앉은 커피와 선명하게 대비되었고, 첫 입에 마신 커피 한 모금의 흔적이 컵 안쪽으로 미끄러지듯 선을 그렸다.  어떤 날은 그 선을 따라 다음 한 모금을 꼭 그만큼씩 마시곤 했다.

   캡슐 커피를 큰 컵 모양으로 한 번 추출하고, 캡슐을 넘긴 뒤 뜨거운 물만 같은 양으로 한 번 더 내리고 나면 컵과 커피를 더한 무게가 작은 편인 내 손으로 들기 딱 적당했다.


   한창 온라인 서점의 굿즈를 고르는 재미에 빠졌었다. 마침 아이와 한창 보던 정글북 콘셉트에, 실패가 없던 알라딘의 컵 굿즈라서 선택했고 도착했는데. 똑 떨어졌다. 모든 면이 전부.

   드립도 캡슐도, 까만 컵의 까만 커피는 뜻밖의 즐거움을 주었다. 심지어 티카미수 라테를 마실 때는 컵에 딱 반만 물을 부으면 맞춤이었다.

   손이 자주 가는 물건이 있다. 아무리 작아도 그 물건을 사용하는 동안 만족스러운 찰나를, 내 눈에만 보이는 즐거움을 만들어내는 물건들. 일상 속에서 반복되는 소소한 과정들을 몸으로만 움직여 수행할 때, 언제인지 모르게 그 공간에 들어와 자연스러운 안정감을 주는 물건들. 잘 어울리니 자꾸 손이 가는지, 자주 쓰다 보니 정이 들었는지 아무 상관없는 시작을 괜히 따져보며 웃게 되는 물건들.  

   혼자 커피를 마실 때, 이 컵을 꺼냈다. 나만을 위한 한 잔의 커피가, 여유로운 시간이, 충만한 분위기가 선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하루 중 그 잠깐의 때가 모여 작은 의식이 되었다.  

   

   일과의 끝에 주방 문을 닫고 돌아서기 전, 물기를 말리는 그릇들 속에 까만 컵이 눈에 띄면 오늘도 잠시 괜찮았구나 토닥인다. 비어있는 날이면 정말 바빴구나 하면서 어떤 하루들을 기록한다.  


   살림살이는 물론 컵도 열심히 사모으기보다 있는 대로 사용하는 편인데, 그중에 마음에 드는 물건이 끼어 있다면 소소한 행복 보장이다. 혼자만의 의식은 웃음기 가득, 더욱 진지해진다.


   모든 물건에는 끝이 있으니 컵의 이가 새끼손톱만 하게 떨어져 나갔다. 전에 설거지 중에 놓쳐 바닥 쪽이 살짝 떨어져 나갔을 땐 매직으로 쓱쓱 칠하고 감쪽같다며 모른 척 계속 썼지만, 이번엔 입이 닿는 자리라 그럴 수 없었다. 아쉬운 마음에 바로 버리지도 못했다. 손이 닿지 않는 선반 맨 위에 한참을 올려두고 지켜보다가, 얼마 전 깨진 그릇들과 함께 마대에 담아 내놓았다.


   옛사랑을 대신할 사랑은 없다. 다만 다른 사랑이 찾아오기 바랄 뿐.

사람들에게는 음료의 정체 파악이 제일로 중요한 모양이었다. 까만 컵을 찾는 일은 요원해 갈 곳을 잃은 나의 손은 이 컵 저 컵 옮겨 다니며 방황했다. 그럼에도 혼자 마시는 커피는 날마다의 일이었고, 어떤 날의 커피는 그저 그랬지만 그럼에도 삶은 계속되니까 그저 옛사랑을 그리워할 뿐이다.


   그리고 이 컵은 머그 중에서도 드물게 유광이었는데, 주변의 빛을 받아치며 반짝이기도 거울 같은 그림자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까만 컵에 비친, 컵을 든 나를 종종 보았고 손잡이를 비춰 그려낸 하트를 발견하기도 했다. 다시 떠올리니 정말 대단한 컵이었군.


마대에 담기 전, 깨진 자리들에 매직을 한 번 더 칠하고 그려두었다. 덕분에 근사한 커피타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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