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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룬 Feb 08. 2024

#20. 다이어리

기록은 기억의 연장술


손 때가 묻은 데님 원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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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실 창으로 해가 들 무렵에 오늘의 할 일을 적어두고, 그 해가 늘 가던 길을 따라 넘어갔을 때 오늘의 한 일을 지운다.  그냥 그렇게 다이어리를 썼고, 쓰고 있다.

   다이어리 쓰는 법을 알려주는 튜토리얼이 다양하고, 다꾸 영상은 빠져서 보고 있자면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재미난 콘텐츠다. 다이어리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들은 펜을 쥐고 쓰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미 거대한 세계를 이룬다.

   하지만 나의 수십 년이 넘은 다이어리 생활은 그런 폼나는 일과는 거리가 멀다.

감각적 운영보다는 그날그날 감정적인 기록을 하며, 이 모든 기록이 기억의 연장을 돕는 것을 고마워한다.


   읽은 책의 제목, 진짜 재미있게 읽었다면 색연필 한 줄 긋고, 주간 수업 일정과 회차, 수업 준비 목록, 아이의 일과, 수업료 납부일, 가계부 식단 장보기 같은 일주일 단위의 살림 루틴, 병원 예약 일정과 차도에 대한 짧은 투병기, 길을 걷다 계시를 받아 적어둔 여섯 개의 쓸쓸한 숫자들, 날이 좋던 날의 푹 빠진 미술관 외출, 날이 흐리던 날의 전시, 그 시공간이 날이 좋아서 혹은 날이 좋지 않음으로 내게 주었던 설렘과 흥분, 미술관 이름아래로 색연필 밑줄, 지인과의 약속 그리고 친구들과의 만남 일정, 누구를 만나고 어디서 만나고 하지만 무얼 먹었는지는 생략, 아침의 상쾌함 속으로 흩어지기 전에 서둘러 휘갈긴 꿈, 기록을 놓쳐 후회하고 만 뭔가 재밌었던 것 같은 꿈을 대신한 말줄임표, 속이 팍 상해버린 일, 그 일이 새끼를 쳐버린 감정들, 그 끝에 사버린 쓰지 않는 물건들, 혹은 차라리 다행이다 싶게 사버린 책들, 달력의 날짜만 봐도 기억나는 내 친구들의 생일을 굳이 한 번 더, 책 읽다 만난 멋진 문장, 어디서 들었는데 내내 기억에 남은 한마디, 엉뚱한 발상, 수많은 다짐, 셀 수 없는 후회, 쓰고 싶은 글, 쓰인 꿈, 날아간 아이디어...... 등


   다른 이의 눈에 별 일 아닌 기록들은 12월의 마지막 주가 되면 그래도 이만하여 다행이고 감사한 꼬박 일 년이 된다. 해마다 그런다.

   얇은 내지가 앞뒤로 꾹꾹 눌러쓴 글씨들 때문에 부풀어 올랐다. 고무끈을 한 바퀴 돌려 걸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벌어져 그 안의 일들이 다 쏟아질지도 모른다.


   2019년은 살며 처음 겪는 일들이 많았다. 다이어리를 펼치고도 글로 옮겨버리면 요동치는 마음 따라 진짜 그런 내가 돼버릴까 봐 한참을 쳐다보기만 했다. 어떤 날은 쳐다보고만 있었는데도 종이가 부풀어 올랐다. 그런 날은 다이어리가 부푼 덕분에 내 마음이 가라앉기도 했다. 손길이, 눈길이 많이 닿았다.


   다이어리를 쓰는 동안 나는 나를 실감한다.

어제를 살았고, 오늘을 살며 내일을 살겠구나 한다.

'잘' 사는 것과는 상관없이 살았으니 살고 있으니 살 것이라며 삶을 기록한다.

   가득 찬 하루도, 기록 없이 빈 하루도 지나고 나면 평안으로 기억되길.  소소한 바람을 더하며 지난 다이어리 중 한 권을 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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