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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체국에 다녀왔습니다.

카드를 만드는 마음

by 이룬

겨울은 내가 첫 번째로 좋아하는 계절이다.

찬 바람을 피하고 추위를 피하고 나면 찾아오는 아늑함이 좋다. 털모자나 머플러, 장갑을 따로 챙기려 신발장에서 한 번 더 돌아보는 외출 준비가, 두툼한 패딩이나 단단한 코트로 몸을 감싸는 차림이 포근해서 좋다. 옆 사람의 손을 잡거나 바람이 들어오지 못하게 팔짱을 꼭 끼고 나란히 걷게 되는 것도, 보일러 온도를 확인하며 공간을 데우고, 보리차를 끓여 따뜻한 물과 집 안의 습도를 유지하려는 일상의 장면도 겨울을 좋아하는 이유다.

초록과 빨강이 교차되는 배경이 어딜 가나 있고, 트리도 선물도 카드도 다 같이 거들며 겨울을 이룬다. 매서운 추위가 깔린 실외라 해도 노란 불빛이 반짝이니 잠시 몸이 녹는 기분이 들기도. 그래서인지 집 밖이 그렇게나 추워도 겨울의 외출은 비교적 순조롭다.


올 들어 가장 낮은 아침 기온을 기록 중인 이번주, 우체국에 다녀왔다.

이미 성탄 축하 메시지를 주고받은 지인도 있지만, 카드를 몇 장 만들게 되었고 그중 몇은 멀리 보내야 해서. 4년 만에 연말 우체국을 찾았다.

대기 번호 6번, 창구의 숫자는 이미 250번을 넘어서고 있었다.

눈만 겨우 보이는 차림의 사람들이 장갑을 입에 물고 소포를 포장하느라 박스테이프를 뜯어내는 소리를 연이어 냈다. 주소를 확인하느라 통화하는 사람들이 수시로 문을 열어 찬 바람을 안으로 들였다. 접수된 택배들의 택배탑을 밖으로 옮기는 끌차도 연신 덜컹거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손에 든 물건의 개수를 세고, 창구의 직원은 빠르게 타이핑을 했다. 다들 누구에게 무엇을 이리도 보내는 걸까. 작업을 돕는 분이 따로 있을 정도로 연말의 우체국은 북적북적했다. 연말 기분을 여기서 누릴 줄이야.


해마다 12월이 되면 첫날에 트리를 세우고, 크리스마스 카드를 만들었다.

겨울이 오면 대형 서점의 문구 코너를 미리 돌아보고, 핀터레스트을 들여다보며 아이디어를 키운다. 심사숙고의 시간을 거쳐 재료 수급 및 제작 가능성 여부를 최종적으로 따져 디자인을 결정하고, 샘플카드를 한 장 만드는 것 까지가 12월이 오기 전에 할 일이었다.

이렇게 써놓으니 대단한 카드 작업인 듯싶은데, 실상은 투박하고 어설프고 작고 얇고 가벼운, 누가 봐도 만든 건가 싶은 카드, 딱 그 정도다. 하지만 손길이 느껴지는 서툰 디테일이 매력의 전부인 카드는 세상에 몇 장 없으니까,라는 제작자의 들뜬 마음은 매 년 씩씩하게 다음 해의 카드를 구상하게 만들었으니 행복한 리추얼이었다.


카드 만들기는 몇 장의 카드를 쓸지 결정하면서 시작된다.

한 장 한 장이 한 땀 한 땀에 해당하므로, 무한정 만들 수는 없다. 몇 장의 카드를 쓸 것인가 하는 질문은 누구에게 보낼 것인가에 해당한다. 책상에 앉아 올해의 기록이 적힌 다이어리를 넘기며, 사진첩의 사진을 위로 올리며, 정기적으로 찾던 공간들을 추리며 사람들을 떠올린다. 여전히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인지, 특히 감사한 일은 누구 덕분이었는지, 빼놓지 않고 소중하다 말하고픈 사람은 누구인지를 정하는 것이다.

리스트가 정해지면, 샘플카드를 토대로 작업을 여러 과정으로 나눈다.

자르고, 접고 누른다. 밑그림, 채색, 레터링의 순서로 표지를 꾸민다. 오리고, 붙이고, 장식을 다는 단계도 따로따로 나눈다. 써야 할 카드가 스무 장이라면 각각의 단계를 스무 번씩 수행하는 것이다. 중간에 책상을 한 번씩 치워야 지우개 가루나 펜의 얼룩이 나도 모르게 묻어나는 일이 없다. 카드가 많아질수록 만들다 지치게 되고, 시즌 에너지가 소진되므로 에너지 총량을 감안해야 한다. 가위질 풀질 글씨 예쁘게 쓰기 및 꾸미기가 이렇게나 고도의 공정을 통한 것이다. 당연히 유치하고, 어쩔 수 없이 엉성하지만 완성된 카드를 늘어놓고 보면 그렇게나 뿌듯하다. 단순하고 기계적인 작업의 반복이 가져다주는 정화의 효과 덕분에 잡생각은 사라지고 머릿 속 안개도 걷힌다. 작업을 하다 보면 와락 떠오르거나, 스멀스멀 미소와 함께 떠오르는 순간이 있다. 내 세계에 들어온 이름들 하나하나가 소중하니, 그에 대한 청량한 기억들을 올해의 추억창에 새겨둔다.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손끝을 따라 일 년간 벌어진 일련의 일들이 하나 둘 정돈되어 간다. 오리고 붙여가며 잘 다듬어낸 기억은 장기기억 저장소로 향하거나 말끔히 잊히거나 둘 중 하나다. 한 해를 마무리하기에 좋은 시간이자 작업이다.


그런데 테니스를 치지 않는 내게 테니스 엘보라는 증상이 생겼고, 그 병에 할 수 있는 모든 치료를 다 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꼼짝 마, 가 내가 할 일이었다. 운동을 하지 않아도 책상에 앉아 작업하는 현대인에게 충분히 찾아올 수 있는 병이라 했지만, 가족들은 사부작거리며 하던 그 모든 만들기 작업들이 운동선수 못지않은 피로감의 원인이라 지적했다. 무언의 압박이 따가웠고, 슬쩍 가위를 들었더니 팔 뒤꿈치가 찌릿해, 카드는 물론 온갖 만들기와 작별했다. 작은 문방구였던 보물상자를 정리해 주변 아이들에게 나눠주었다. 고맙게도 나의 카드를 기다리던 몇몇에게도 공식적으로 안녕을 고했다. 허전하고 쓸쓸한 카드 없는 겨울을 벌써 여러 해 보낸 것이다.

올해도 계획은 없었다. 생각도 안했는데, 겨울이 시작되며 예상하지 못한 선물을 두 번이나 받았다. 아무 날도 아니고, 얼굴을 보며 만난 것도 아니었는데 호의 가득한 선물이 내게로 왔다. 진심으로 고마웠다. 12월은 선물 시즌. 주는 기쁨이 물론 크지만, 이렇게 선물을 받으니 기분이 무지 좋았다. 가득 채워준 고마운 마음을 잘 담아 인사하고 싶었고, 그렇다면 손카드만 한 게 없었다. 어쩔 수가 없네, 이번엔 카드를 만드는 수밖에. 이렇게 된 것이다.

만들기로 한 김에 몇 장만 더하기로. 재료를 주문하고 하루, 종이 접는데 하루, 이미지 구상에 이틀, 밑그림 그려두고 색그림을 그리는 데 이틀, 레터링과 테이핑 작업을 하루에 끝냈다. 다시 아플까 봐 겁이 나서 일주일을 찬찬히 쪼개서 작업했다. 등 뒤로 따뜻하게 해가 드는 시간에 크리스마스 카드를 만들었다. 메시지는 틈틈이 할 말이 다 모이면 적었다. 직접 만나서 줄 수 있는 카드는 아직 시간이 있으므로, 우편으로 가야 하는 카드부터 챙겼다.


내 순서를 기다리는데 우체국 간판 아래 눈에 띄는 공지가 있었다.

김장철을 맞아 김치 해외 배송에 관한 주의사항. 우리는 이제 김치를 사 먹는다. 치솟는 배추값이 김치값보다 부담이고 소비량도 줄었고, 일 년 내내 사 먹을 수 있는 김치 때문에 겨울을 힘들게 시작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주변엔 우리와 같은 이들이 많다. 하지만 타국에 사는 자식들에게, 지인들에게 보내는 김치 소포는 김치가 가장 맛있게 담가지는 이 계절에 많은 모양이다. 가장 좋은 것으로 고르고 담아, 있는 그 자리로 보내주고 싶은 대상이 있다면 그 자체로 감사한 일이다. 그런 마음들이 나를 채우고 있음이, 표현할 기회와 방법이 내게 있음이, 그 마음을 받을 이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음이 모두 감사한 일이다. 힘들여 담근 김치를 그보다 더 비싼 값의 배송비를 더해 보내는 정성도, 카드를 쓰며 말랑해진 내 마음과 닮아있을 것이다. 부디 비닐이, 박스가 터지지 않고 무사히 도착하기를!



일반 우편은 일주일 걸려요.

준 등기는 사흘 안에 들어가는데, 카드 한 장에 1800원. 그걸로 하시겠어요?


네! 빨리 가는 걸로 해주세요.


내가 건넨 카드가 직원분의 타이핑을 통해 갈 곳을 확정받고 있었다. 요즘엔 카드 봉투만 따로 파는 곳도 많지 않아, 품을 들여 찾고 며칠 기다려 받았는데 그러길 잘했다 싶었다. 빨간색 카드봉투가 우체국 안의 분주함 속에서도 한눈에 들어왔다. 내년에도 카드를 보낼 수 있기를 바라며, 찬바람에 코가 어는 줄도 모르고 신나게 우체국에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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