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 없는 산책
“점심 먹고 나가서 잠깐 걸어봐. 좀 나아질 거야.”
아침에 친구에게 일어난 속상한 일을 들었다. 그 마음을 짐작하고도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할 수 있는 말은 이 말 뿐이었다.
걸으면 좀 나아지니까. 달라지는 게 없더라도 분명 나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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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이와 나가 자주 걷는다.
집 앞 공원을 돌거나, 멀리 식물원의 호수를 찾기도, 동네를 다니며 새로 생긴 가게들을 두리번거리고, 몇 정거장 떨어진 다이소 매장을 찍기도, 라테의 크림이 진한 카페를 다녀오기도 한다. 함께 걷기는 아끼는 일상이다. 퇴근한 그이와 밤 산책을 하거나, 주말 오후면 나가 걸었다. 그전에는 걷는 것 자체를 피했지만, 함께 보내는 시간이 좋으니 종종 걸으며 지냈다. 다만, 혼자 나가 걷는 일은 드물었다. 혼자 걷기는 지루했다. 지루함을 이겨내기 위해 모르는 동네를 찾아가라던데, 외출 자체가 미션인 내게 낯가림까지 극복하며 굳이 그럴 일은 아니었다. 한편, 혼자 걷다 보면 금세 조급해졌다. 나아갈 길보다 돌아갈 길이 점점 길어져, 부담이 불어났다. 언제 다시 돌아간담, 이런저런 이유로 걷자고 혼자 나서진 않았다.
그날, 좋지 않은 소식을 들었고, 이내 나쁜 생각이 부풀었다. 그대로 집에 있다가는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그이의 퇴근을 기다릴 수 없었다. 나가 걷기라도 해야겠다 싶었다. 낯설게 새로 시도하는 어떤 일은 궁지에 몰려 터져 나오는 발악의 얼굴을 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옷을 챙겨 입었다. 내가 가진 가장 큰 에코백에 패드며 키보드, 책이며 필통까지 눈에 보이는 대로 쓸어 담았다. 그대로 집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일단 걸었다. 발걸음은 익숙한 곳을 향했다. 울기 위해 소파에 앉지 않고, 울음을 삼키고 걸었다. 지루함도 조금함도 파고들 틈이 없었다. 혼자 걸었다. 평소에 하지 않던 행동을 함으로, 닥친 현실이 내 것이 아닌 양 멀리 떨어져 스쳐 보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한적하게 걷기 좋은 식물원까지, 집에서 1킬로가 조금 넘는다. 큰 건물과 대로를 지나고 몇 개의 횡단보도를 건너니 비로소 식물원의 입구가 보였다. 점심시간이 지난 때라 사람이 많지 않았고, 눈앞엔 트인 공간이 펼쳐졌다. 잠시 넓고 먼, 공원 지도가 떠올라 주춤했으나, 그대로 집으로 돌아가고 싶진 않았다. 큰 숨이 쉬어졌다. 숨을 여러 번 몰아쉬고 여둘톡 팟캐스트를 틀고 이어폰을 꽂았다. 눈에 익은 장소, 익숙한 목소리에 기대니 조금은 긴장이 풀렸다. 한 뼘 더 나아가보자. 생각은 멈추고 두 발을 움직이기로 했다. 발만 멈추지 말자, 그저 걸어보자.
얼마나 걸었을까, 호수의 가운데쯤 왔을 때 몸의 온기가 올라왔다. 출발할 때는 총총 걷다 장군처럼 걷다 오락가락했는데, 어느새 보폭이 일정해졌다. 내 걸음 속도가 몸에 익어갔다. 얼마나 걸었을까.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야 시간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러지 않기로 했다. 멈춰 서서, 온갖 짐을 때려 넣은 가방을 뒤적이며 시간을 확인하자고 폰을 찾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그대로 산책로 끝까지 가서 한강을 보고 오기로 했다. 나무를 보고 걷다가 물을 찍고 돌아오는 걸 오늘의 산책으로 삼기로.
여기까지 왔는데, 그저 걷기만 했는데 이리되었다니, 먼 길이 좀 만만하게 느껴졌다. 반갑지 않은 소식은 내게서 저만치 떨어져 있었고, 부풀어 오르던 나쁜 생각들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힘을 잃고 있었다.
평소의 나는 시간을 정해두고 움직이는 편이다. 그간의 산책도,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산책하기 내지는 두 시간 정도 산책하기,라고 시간을 정했더랬다. 일정을, 일과를 시간을 기준으로 정해두었다. 굉장히 바빠 시간을 쪼개 사는 것도 아니면서 그랬다. 경계를 정해두는 편이 안전하다 느낀 것 같다. 그런데 그날은 휴대폰을 통하는 그 어떤 것도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손목시계를 따로 차지 않으니 시간 역시 확인하지 않을 것에 포함되었다. 얼마나 걸었는지, 얼마의 시간을 걸음으로 채웠는지 모른 체 걸었다. 작정하고 나선 길이 아니다 보니, 평소와 다른 혼자 걷기에 정해진 게 하나도 없었다. 회중시계를 잃어버린 토끼는 멈춰 섰겠지만, 나는 여전히 두 발을 움직여 걷고 있었다. 두어 번 해가 잘 드는 벤치에 앉아 쉬기도 했다. 나무들도 보고 꾸며놓은 정원도 보았지만 주로 내 그림자를 보며 걸었다. 운동화의 앞코를 따라 길었다 짧아지고 등 뒤로 사라졌다 다시 길어지는 길 위의 그림자를 보면서 걸었다. 아직 눈에 익은 장소였고, 마침 그날의 여둘톡 녹음분이 길어 익숙한 목소리도 여전했다.
한강이 보이는 곳에 도착했다.
다리를 건너며 발 밑으로 빠르게 지나는 차들을 내려다보았고, 산책로 끝 난간 손잡이를 꼭 붙들고 서서 바람에 밀려 서로 다른 방향으로 물결을 일으키는 한강을 내다보았다. 그 끝에 가만히 멈추어 섰다. 집에서 나와 걸어서 갈 수 있는 가장 멀리였다. 혼자 걸어 가장 먼 반환점을 돌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땀이 송글 맺히고, 갈증이 좀 났을 뿐이었다.
이미 눈에 익어서인지 돌아오는 길은 훨씬 짧게 느껴졌다. 그렇게 멀게 보였던 길을 이번엔 아주 잘 아는 사람처럼 성큼성큼 걸었다. 이렇게 된 거, 조금 더 놀다 들어갈까 하며 카페로 들어갔다. 시원한 음료로 갈증을 해소하고 짐 많은 가방을 그제야 열었다. 폰이며 패드를 테이블 위로 꺼내니, 화면에 시간이 떴다. 집에서 나온 지 세 시간이 훨씬 지났네. 예상했던 것보다 긴 시간이었다. 어느새 해는 저만큼 넘어가 큰 건물에 가려진 자리는 이미 어둑해졌다. 시간은 저대로 그저 흘렀다.
혼자 걷고, 천천히 걷고, 걷고 싶은 데까지 걸어본 날이었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걷다가 팔을 흔들며 걸었고, 잠바를 벗어 허리에 감고 걸었다. 무거운 가방은 어깨를 옮겨 다니다가, 경계해야 할 상황에선 방패처럼 나를 앞섰다. 걷기만 한 덕분에 눈앞의 찰나들이 사진처럼 기억에 남았다.
답을 얻어 돌아온 것은 아니지만, 답을 찾아 나선 길이 아니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좋았다. 나아진 것 같았다.
그날 이후로, 툭하면 혼자 나가 걷는다.
바람을 품고, 마음을 정리하고, 생각을 다지겠다 마음먹지 않는다. 그러려고 나가지 않는다. 그저 걷고 들어온다.
그날 이후로, 그이와 함께라도 걷는 동안이라면 가능한 시간을 확인하지 않는다. 굳이 정해두지 않아도 흐를 시간은 흐르니까, 어차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니 휴대폰을 꺼내는 수고라도 줄이기로.
그날 이후로 좀 다르게 걷게 되었다. 그저 두 발이 차곡차곡 내딛는 걸음으로 걷는다. 그렇게 걷고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