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펌(파마)으로 얻은 것
장마철이 다가오는 것을 누구보다 빠르게 감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곱슬머리들일 것이다. 대기의 습도가 올라갈수록 거울 속 머리카락들도 하나둘 살아난다. 가지런히 머리를 펴는데 일생의 일부를 내주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습기의 공격에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경험을 수천번도 더 겪어온 이들은 가느다란 머리카락으로 장마를 예상한다. 잘 알 수밖에. 나는 곱슬머리다. 악성 곱슬은 아니지만 반곱슬도 곱슬, 꼬불꼬불 보다는 부스스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머리카락으로 나고 자라고 살아왔다.
특히 고온 다습의 이 땅에선 여름이 다가오면 해그리드의 풍모를 닮아간다. 원하던 바가 아니거늘.
광고에 등장하는 거친 머릿결 전용 에센스, 놀랍게도 5분 안에 곱슬을 잠재우는 에센스, 곱슬마저도 반할 트리트먼트까지 써보지 않은 제품이 없다. 스트레이터( 납작한 판 사이에 머리카락을 끼워 쭉 펴는 기기 )를 달고 살았다. 기기를 다루는 기술은 경지에 올랐지만, 테니스 엘보를 얻었다. 청소년때는 엄마한테 잘 보이고 우는 소리를 해가며 롤스트레이트를 했다. 어른이 되어서는 고가의 매직펌을 했다. 매직펌, 이름 그대로 마법 같은 펌이다. 머리를 감고 나와도 그러니까 머리카락이 수분을 한껏 머금었다 뱉고난 후에도 머리카락이 지글거리지 않는다. 말려주기만 하면 알아서 쭉 뻗어, 샴푸 광고에 등장하는 찰랑거리고 가지런한 머릿결이 된다.
지금은 찰랑거리는 생머리도, 부스스한 폭탄 머리도 개인의 선택으로 받아들여지지만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부스스한 쪽은 단정하지 않은 모습이었고 관리하지 않은 인상을 주었다. 그리고 그때의 나는 그렇게 보이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기에 머리를 진정시키지 않고서는 내가 진정되지 않았다. 물론 매직펌에도 치명적인 단점이 있지만, 10분 더 자거나 식빵이라도 한 조각 먹고 싶은 아침을 위해 감수해야 했다.
하루의 시작. 머리를 하고, 화장을 하고, 옷을 골라 입으며 자신을 맘에 드는 모습으로 가꾸는 일은 멋진 의식과도 같다. 자신을 꾸미는 즐거움을 안다는 것은 과하지만 않다면 자신을 사랑하는 건강한 표현이라 생각한다. 다만 곱슬을 펴는 일은 잘못된 무엇인가를 바로잡는 기분이 들었다. 매직을 하고 나면, 유지되는 동안에는 불편하게 손대지 않고 지낼 수 있었다. 매직펌의 효과는 동화 속 호박이 마차로 변한 것만큼의 환호가 나오는 마법같았다.
하지만 12시가 되면 마차는 다시 호박으로 돌아간다. 영원한 마법은 없는 법이니.
새로 자라는, 앞서 난 머리카락을 따라 두피를 뚫고 올라오는, 약이 닿지 않은, 마법에 걸리지 않은 머리카락은 원래 곱슬이 아닌가. 새 머리카락이 손가락 한 마디쯤 자라면 습도 감지 기능이 작동해 꼬부라지고, 두 마디 정도로 길어지면 곱슬인의 정체가 드러난다. 한 뼘이 되기 전에 서둘러 뿌리 매직을 예약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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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 대비를 위해 매직 세팅펌(두피 쪽은 매직이고 끝에 웨이브가 들어간 매직펌의 응용버전) 예약을 하고 미용실로 갔다. 원장님은 내가 성인이 되어 만난 네 번째 헤어 디자이너이자, 우리 가족이 5년이 넘게 머리를 맡기고 있는 분이다. 손이 맞는 선생님을 만나면 길게 만나는 편이니, 미용실 원장님과의 시간은 온전한 신뢰의 증거가 된다. 그런 분이 내게 새로운 펌을 권했다. 그렇지 않아도 올 것 같아 기다렸다며.
곱슬인에게 매직 말고 다른 게 가능하다니요?
그것은 바로 히피펌, 부스스한 스타일이 매력인 펌이다.
도구를 세로로 감아올려 웨이브를 만들고, 전체적으로 부스스하고 풍성하며 자연스러운 느낌의 스타일이란다. 퐁실퐁실 떠오르는 머리카락이 지글지글 부스스한 모양을 하는데, 그게 바로 제 스타일. 머리를 감고 두피를 말린 뒤 촉촉 에센스로 컬을 만져주는 정도면 손질도 끝이란다. 곱슬 머리카락에 펌이 더 잘 나오는 편이고, 애초에 부스스한 게 특징이니 새로 자라는 머리카락이 곱슬인의 정체를 드러낸들 전혀 신경 쓰이지 않을 것이라 했다.
하나같이 귀담아듣지 않을 이유가 없는 장점뿐이었다. 낯설고 대범한 이름의 펌과 내가 어울릴까, 곧 장마인데 매직을 버려도 될까 망설여졌지만 원장님은 자신만만했다. 나의 머리를, 헤어스타일에 관한 나의 취향을 가장 잘 아는 전문가의 추천, 나의 예측보다 그의 경험과 기술을 더 믿었다.
합시다, 히피펌!
그리고 결과는 500프로 만족이다. 천 프로는 거짓말 같을까 봐.
나는 히피펌의 부스스를 한껏 누리며 살고 있다. 아침에 10분 더 자고, 식빵에 사과도 먹는다. 머리를 감고 나와 다이슨을 들지만, 두피만 말리면 되니 3분도 안 걸린다. 촉촉 에센스를 바르며 웨이브를 한 번씩 꼭 쥐었다 놓아주는 것으로 관리는 끝이다. 늘 두피에 가깝게 붙어있던 머리카락이 마르면서 퐁실하고 떠올라 볼륨감을 뽐내니 숱도 풍성해 보이고 그 덕에 생기가 생긴다. 부스스한 머리카락은 더 이상 지저분하게 보이기보다, 웨이브인가 싶다. 툭툭 말려도, 반 묶음도, 포니테일로 올려도, 살짝만 집어도 스타일링이 가능하다. 주로 있는 그대로 풀어헤치는 쪽을 가장 즐기고 있지만.
복잡하고 오래 걸리던 관리가 필요 없어지니 스타일링 습관이나 기준도 달라진다. 바로 잡거나 바꾸기보다 있는 그대로를 유지하는 손길을 쓰면서, 지금 이대로의 모습을 더 자주 보게 된다. 조금은 더 친근하게 느껴지는 내 모습에 제법 적응이 되었다. 천덕꾸러기 같던 곱슬 머리카락들은 더 이상 찰랑거리지 않지만, 꼬불꼬불 흔들리는 게 꽤 귀엽다. 귀찮고 번거로운 루틴을 덜어내고, 원래 있던 것들 원래 그랬던 것들을 새삼스레 달리 보는 단장의 시간을 갖는다.
오래되고 익숙한 것이 편하기에, 새로운 시도는 드문 삶이었다. 하물며 날마다 거울에서 확인하게 되는 헤어 스타일의 변화라니, 너무 고민되는 일이었다. 망쳤다가는 수개월을 한숨으로 지내게 될 것이니 말이다. 그런 면에서 낯선 이름의 펌을 해버린 ( 충분히 믿을만한 전문가의 추천이긴 했지만 ) 그 순간의 낯선 내가 기특하다. 히피펌을 하지 않고 하던 대로 매직을 했다면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낯선 선택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걸, 마음에 안드는 머리야 길어 자르면 그만이지 생각할 수 있다는 걸. 내가 말이다. 보기에 따라서 부스스한 모습이, 해그리드의 유전자가 매력이 된다는 걸, 그 모습을 아침마다 거울 속에서 발견하고 즐거워할 사람이 내가 될 것이라는 것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틀에 박힌 통념과 제도를 부정하고 탈 사회적으로 행동하는 자유로운 영혼들, 히피들의 이름을 딴 펌을 한 덕분에 그들이 누리던 자유에 더욱 가까워진다. 일부러 머리를 헝클기도, 또 다른 곱슬에게 히피펌을 권하기도 한다. 몇 달이 지나도 여전히 만족스럽다. 우기를 맞은 동남아시아 여행에서도 머리 때문에 신경 쓸 일은 전혀 없었으니. 새 머리카락이 나고 있지만, 뿌리 매직을 따라잡아야 하는 조급함은 간데없다. 그저 머리를 감고 툭툭이다. 오늘도 거울 속 나는 생기 있고 자유로우며 편하다. 12시가 지나면 풀리는 마법 없이도, 있는 그대로 만으로도 좋을 자유를 누린다.
히피펌을 하러 미용실에 다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