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에세이연습용 글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새회사 임용이 몇주 미뤄졌다. 칼럼으로 돈을 벌고 싶었으나, 막 시작하는 초보 칼럼니스트에게 일이 쉽사리 주어질리가 없다. 생활비가 바닥이 났고, 나는 여러가지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하게 되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연기다. 보조출연부터 장편영화의 단역, 단편영화 출연까지 골고루 채용공고를 뒤지고 있다. 리스트를 체크 하던 중 내 눈을 사로잡으며 호흡이 가빠지게 하고 동시에 폭소가 터졌던 자리가 있으니... 바로 사극드라마의 단역자리다. 간통죄로 잡혀온 조선시대 삼십대여인으로, 관아에서 엉덩이를 맞으며 울고 잘못했다고 싹싹 빌면 백만원이 아르바이트비로 나온다고 한다. 나는 이 장면을 상상하자 너무 웃음이 나서 끅끅 거렸다. 나는 왠지 이 장면을 연기한다면, 혼신의 힘을 다해서 억울한 입술을 댓발 내밀게 분명했다.
글을 쓰다보니 스무살때 연극을 배운답시고 대학로에 들락거렸던 기억이 난다. 버스정류장에서 본 전단지를 보고 연락해 찾아간 곳은, 작은 지하 연습실이었다. 십오년전이라 기억이 다 바랬는데, 남자선생님이셨고 무척 좌파적인 성향을 지녔던 것으로 기억된다. 국립극장이 얼마나 편파적인 곳인지 정성을 들여 비난하셨다. 아무튼간에, 그 곳에 잠깐 만났던 친구들이 기억난다. 대부분 무꺼풀의 소유자들이었는데, 그 친구들은 나랑 마음가짐이 달랐다. 내가 그곳의 유일한 대학생이었고, 나머지 내 또래들은 아르바이트를 하며 연극을 배웠다. 자기소개시간이 지나고 "연대생? 워~~~~" 하는데 나는 귀 끝까지 빨개졌다. 그런 부끄러움은 수업 내내 계속 되었다. 선생님이 연극과 연기에는 기초체력이 중요하다고 하시며 앞구르기를 시키셨는데, 고등학교 내내 수험생활을 했던 내 몸은 쉬이 유연해지지 않았고 나는 어거지로 앞구르기를 하다 목을 삐었고 수치심에 달아올랐다.
그래도 기억에 남는 시간이 있는데, 선생님이 연습실의 불을 끄고 이 곳을 바다속 깊은 곳이라 상상 해보라고 하셨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몸을 웅크렸다. 사실 바다속이라면 해괴망측하고 기상천외한 해양생물들로 무시무시한 곳일텐데, 다들 따뜻한 엄마 몸속 자궁 안을 상상하는지 표정들도 부드러웠다. 아마도 연기실습을 받던 아이들은 통상적으로 이런 상상력이 필요한 수업을 듣나 보다 하고 지금에서야 이런 생각이 든다. 상상력과 경험의 소산으로 연기를 한다면, 그때의 그 수업은 상상력이 필요한 수업이었을꺼야. 아무튼 까만 타이즈를 신고 티셔츠를 입고 데굴데굴 구르기도 하고 해저생물이 되어본 경험은 가끔 기억이 난다. 그때 그 친구들 중에 몇이나 연기로 생활을 생계를 유지하고 있을까? 아마 누군가는 연극계 혹은 영화계에 자리잡아, 오늘날의 내가 백만원 때문에 조선시대 여자죄인1을 하려는 걸 안타깝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그때 진지했던 친구들의 얼굴을 떠올리니, 아르바이트이지만 왠지 조금은 진지하게 이 일에 접근해야 할 것 간 같다. 최선을 다해 오열하자.
이십대 중반의 나는 '꿈'이란 단어를 좋아했다. 이름이 기억안나는데, 어떤 위인이 이런 말을 했다. 꿈이 있는 사람은 그 꿈을 닮아간다고. 그 문장을 싸이월드 미니홈피 다이어리에 적어놓고, 포도알 스티커도 많이 받았고 난 뿌듯했다. 오늘 날에 난 꿈도 없고 당장 전염병으로 생긴 공백기간 동안의 생활비가 급하다. 꿈이 있으면 이상한 나이인가 싶기도 하다. 꿈을 이룬 사람들을 보면 자뭇 가슴이 아리기도 하지만, 그래도 응원하고 싶다. 가끔 평범함을 좋아하고 유독 강조하는 내 자신이, 가끔 아주 가끔 초라하게 생각된다. 바닥에 떨어진 몽당연필같다고. 꿈이 많았지만 꿈을 향해 달려가는 대신에 보통의 길을 걷기로 작정한 순간 내가 너무 늦었다고 생각이 들었다. 꿈이란 단어를 함부로 남발했던 내 자신이 창피해. 이렇게 자학하고 싶은 날이면, 치킨을 뜯고 싶지만 굶을 거고 예전 몸매로 돌아갈거다. 그래서 오디션에 합격해서 백만원 벌어야지. 조선시대 여자죄인1은 당분간 내꿈이다. 간통죄는 폐지됬지만, 나는 진심을 다해 울거다. 누가봐도 서럽게 눈물콧물 다 흘리며, 내 온갖 경험과 상상력을 모아 진정성이란 정체불명의 신기루를 만들어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