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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유 Ayu Sep 02. 2022

솔직함과 무례함 사이

High Risk High Return


발리에서 자연과 연결되었다고 느끼는 순간 중 하나는 밤하늘의 달을 볼 때다. 우붓은 보름달이 뜨는 날(full moon day, 이하 ‘풀문데이’)과 달이 뜨지 않는 날(new moon day, 이하 ‘뉴문데이’)엔 힌두교 전통세레모니가 있어 새벽까지 동네가 시끌시끌하다.

그리고 내가 수련하는 아쉬탕가요가는 한 달에 두 번, 문데이에 휴식을 갖는다. 보름달이 뜨는 날은 에너지가 너무 강해서 부상위험이 있어서 쉬고, 달이 뜨지 않는 날은 에너지가 약하기에 평소 이상의 힘을 쓰다가 무리해서 다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우붓의 다른 요가원에서는 문데이에 세레모니를 위한 이벤트를 열어 다같이 찬팅chanting을 하거나 장작에 불을 피고 노래를 한다.



발리에서의 새로운 두달살이를 위해 돌아온 첫 금요일은 보름달이 뜨는 풀문데이였고, 나는 계속 눈여겨 왔던 현지요가원에서 열리는 세레모니에 참석했다. 우리는 정화를 위한 만트라를 배웠고, 108번의 정화 만트라를 같이 외웠다. 찬팅을 마치고 바라본 밤하늘은 맑았고, 보름달이 크고 또렷해서 참여한 인원 모두 탄성을 지르며 행복한 얼굴로 세레머니를 마쳤다. 우붓에 다시 돌아오길 잘했다는 마음이 저절로 올라온 순간이었다.

요가원을 나서려는 찰나 한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그는 스페인출신으로 여름휴가 목적으로 우붓에 한 달 여행 온 사람이었는데 내가 한국에서 왔다는 말에 우붓센터에서 항상 사람이 바글바글한 한식당을 봤다고 했다. 외국인에게 한식을 소개시켜주면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에 나중에 기회가 되면 같이 가자고 인사를 나누고 집으로 돌아왔다.




몇일 후 스페인친구는 메신저로 한식당의 위치를 공유해왔다. 신씨화로(Sinssihwaro korean BBQ); 삼겹살을 주메뉴로 하는 곳이었고 비빔국수와 된장찌개까지 한국의 흔한 고기집을 떠올리게 하는 식당이었다. 소주까지 겸비한 이 한식당에서 발리의 흔한 맥주인 빈땅과 소주를 섞어서 소맥을 만들면 어떤 맛일지 궁금해져서 금새 약속을 잡았다.

새우구이를 시키겠다는 친구에게 나는 삼겹살을 강력추천했고, 비빔국수와 된장찌개, 소주, 맥주까지 줄줄이 메뉴를 외는 내 모습에 스페인친구는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주문 후 종업원이 직접 구워먹을거냐고 물어봤고 나는 당연하게 그렇다고 말하자, 스페인친구는 “cook”이라는 단어에 꽂혀서 네가 직접 주방에 들어가서 요리하는거냐고 물어봐 나는 한참을 웃었다. 자리에서 구워먹는 삼겹살에 친구는 한국음식은 처음인데 정말 맛있다며 연신 감탄을 쏟아냈다. 한식을 알려서 뿌듯했지만 그는 정말 말이 많았고, 나는 호주의 여독이 남아있는 상태라 너무 피곤했다. 사실 나는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도 모르게 적당히 식사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쏟아지는 잠을 청했다.




거절의사를 표현하는건 언제나 어렵다. 평소엔 솔직한 편이지만 거절에 있어서는 솔직하지 못해 언제나 뒤로 숨는다.  특히 이성적인 관심 같은 감정적인 거절은 정말 어려워 시간을 끌거나 침묵으로 일관하는 버릇이 있다.

몇일 후 그 친구는 우붓에서 전통세레모니를 같이 보지 않겠냐며 연락이 왔고, 나는 세레모니에 별로 흥미가 없다고 답장을 보냈다. 실제로 우붓에서 처음 전통세레모니를 보러간 날, 같이 보러간 친구들에게 지루하다고 빨리 집에 가자고 보챈 적이 있다. 그리고 나는 스페인친구에게 이성적으로 관심이 없었고 평소의 내 방식대로 그 이후로도 그에게서 온 몇번의 연락에 답을 하지 않았다.



한식당에서 식사를 나눈지 일주일만에 처음 만났던 요가원이 아닌, 다른 요가원에서 그 친구를 우연히 다시 마주쳤다. 나로서는 거절의 순간들이 떠올라 당황스러워 말이 잘 나오지 않았지만 그 친구는 너무나 반갑게 나에게 인사와 포옹을 건넸다. 수업이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잠깐 대화를 나누었고 그는 정말 직접적으로 나에게 왜 답을 하지 않았냐고 물었다. 혹시 자기가 실수한게 있는지, 자기가 너무 말이 많았는지, 커뮤니케이션의 기술에 서툰 부분이 있었다면 말해달라며 물어보았고 나는 또 여느때와 같이 솔직하지 않게 그저 근래에 피곤해서 혼자 지낸 것 뿐이라며 간결하게 대답했다. 우리는 우연하게도 두어번 더 마주쳤고 같은 요가수업을 들으며 점점 가까워졌다. 하지만 이 말 많은 친구가 수련 후 내 평온한 마음을 깰까봐, 수업이 마칠 때마다 나는 조용히 혼자 걷고싶다며 서둘러 집에 혼자 가기를 고집했다.




하루는 그 친구가 사는 동네 근처의 요가원에서 열리는 수업에 같이 참여했고, 수업 전 우리는 같이 저녁식사를 했다. 그 친구의 동네를 같이 다니며 나는 정말 놀랐다. 우연히 겹친 요가수업 전후로도 그는 항상 사람들과 둘러싸여 있었고 요가원에서도 나에게 자기 친구들을 여러명 소개시켜주었지만, 그의 동네에서 그는 더더욱 인싸였다. 나도 우붓에서 웬만한 인싸지만- 숙소를 잡으면 그 숙소 근처 식당, 카페, 가게, 세탁소, 환전소, 택시기사 등등의 현지인과 모두 친구가 되는 우붓인싸- 나보다 더한 인싸는 처음봤다. 그 날은 친구의 모습을 보며 나에 대한 관심은 이성적인 관심보단 그저 요가수련자로서의 열린마음임을 깨달았고, 그를 경계했던 마음이 무너졌다.

식사를 하면서 친구는 나에게 ‘너는 무엇을 원하는지 잘 말하지 않는 것 같다’며 너랑 같이 있을 때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뭘 하고싶은지 도무지 모르겠다며 이제는 너무 숨겨서 나도 모르겠는 내 속마음에 노크를 해왔다. 마침 나는 근래에 솔직하지 못한 성격을 어떻게하면 고칠 수 있을지 고민중이었고, 화제가 수면 위로 올라온 만큼 ‘나는 솔직하지 못하고 거절을 잘 못해서 침묵하는 편이다. 최근에도 친한 친구가 그런 내 모습에 실망하고 인간관계가 틀어졌다’며 심리상담하듯 털어놓았다. 친구는 “글쎄… 솔직해진다는건 어느정도 위험을 감수하는거긴하지. 근데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 솔직해지면 진짜 친구들만 주변에 남아. 그렇게 솔직해져도 편한 친구들이랑만 지내면 되지 않을까?”라며 자기 생각을 나누었다. 그 친구의 얘기를 듣는 순간 최근 나에게 절교를 선언한 친한친구에 대해서도 ‘내가 침묵하든 솔직하게 말하든 떠나갈 인연이었겠구나..’라는 생각에 마음이 편안해졌고, 속깊은 대화에 그에게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었다.


그 날 요가수련 후, 친구는 같은 방향까지 같이 걸어가도 되냐며 물어왔다. 여전히 크게 내키진 않았지만 “Can I ~?”라고 두 손 모아 공손히 물어보는 친구를 거절하는건 또 너무 어려워서, 그러자고 했다. 친구랑 집에 걸어오면서 나는 정말 너무 너무 후회했다. 친구는 또 신나서 말이 많았고 심지어 팔을 툭툭 치며 대화하는 버릇이 있어서 나는 시끄럽고 좁고 어두운 인도를 걸으며 한껏 예민해져버렸다. 결국 요가수련 후 평온한 마음을 유지하지 못하고 걸어가는 도중 팔을 건들지 말아달라고 단호하게 말한 바람에 그 친구는 손을 양 손 바지 주머니에 넣고 걷기 시작했으며, 헤어지는 갈림길에 도달하자마자 나는 그에게 ‘너는 좀 내가 뭘 물어보거나 말할 때 내 말은 안듣고 너 얘기만 계속 하는 경향이 있는거같다’고 정말 솔직하게 오늘의 예민함을 전해버렸다. 그것도 부족해서 집에 들어가서도 친구에게 앞으로 수련 후에는 따로 걸어가고싶다고 메세지를 전하고서야 ‘이정도로 솔직하면 되나?’ 긴가민가하며 잠을 청했다.


몇일 후 맛집을 검색하다가 스페인친구가 사는 숙소 근처에 위치하길래 그에게 같이 가지 않겠냐고 연락을 했고, 우리는 밥먹고 같이 카페가서 책을 읽자고 계획하고 만났다. 우리가 간 식당은 채식식당이었는데 단언컨데 내가 지금까지 가본 우붓의 식당 중 최고로 맛있었다.

친구는 Five elements 라는 책을 가져왔는데 사람의 성격을 “물, 불, 흙, 나무, 쇠”로 구분하고 있는 목차를 둘러보니 우리나라의 사주오행 같아보였다. 이전에도 나에게 별자리를 물어보며 별자리로 성격을 파악하는 친구였기에, 재빠르게 사주어플을 깔아서 친구의 사주를 봐주었다. 친구는 역시나 자기성격을 자세히 설명해주는 사주를 보며 너무 신기하며 즐거워했고, 내 사주도 궁금하다해서 내 사주도 읽어주었다. 한국어인 사주풀이를 영어로 요약하며 말해주다가, 나의 사주 중 “꼼꼼하고 야무지다”라는 표현을 어떻게 말해야하나 고민하며 재빠르게 구글 번역기에 돌려보았다.



무례하다? 이건 오역이다 싶어 다시 네이버로 검색창을 돌리려는 순간, 그 친구는 내 핸드폰화면을 보며 대답했다.


맞아맞아, 이거 진짜 정확하네.


한 대 맞은 기분으로 “뭐라고???”라고 대답하며 바라본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고 나는 그 상황이 그저 황당해 숨넘어갈듯 웃어버렸다. 친구는 지난번 너가 ‘이제 집에 따로가자, 너는 너무 말이 많다’라고 말해서 자기는 해명할 기회도 없이 ‘이제 만날 기회도 없고, 말 많고 피곤한 사람으로 기억되겠지.’라고 생각했는데 너가 오늘 식사를 하자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친구의 제안대로 솔직하려던 나의 노력이 매끄럽지 못하고 극단적이었지만, 오히려 관계를 개선시킬 기회로 받아들이고 오늘 식사제안에 응한 친구의 진심이 느껴진 순간이었다.


그 날 이후 친구가 스페인으로 돌아가기 전 남은 몇일 동안 우리는 여느때와 같이 자주 요가원에서 마주쳐 같이 수련을 했고, 서로의 친구들을 소개시켜주며 식사를 했다. 이전에 비해 나는 그보다 더 많이 말했고, 속마음을 더 쉽게 표현하고, 원하는걸 가볍게 말했다. 그런 나를 보며 그 친구는 내가 너무 달라졌다며 놀라워했다. 나도 그 친구 앞에서만큼은 편하게 솔직한 마음을 표현하는 변한 내 모습이 놀라웠다.

우리는 둘 다 발리에서 가장 좋아하는 과일로 파파야를 꼽았었는데, 나는 이제야 잘 익은 파파야가 된 것 같다며, ‘뭐든 시간이 필요한거 아니겠어?’ 라며 여유있게 대답했다.




그 친구는 떠나기 전에 본인이 스페인에 돌아가더라도 영상통화를 하며 종종 명상을 하면 좋겠다며 그렇게 우정을 이어가자고 제안했다. 나는 사주어플을 함께 확인했던 순간이 그 친구와 나의 관계에 터닝포인트라고 느껴져서 이 추억을 간직할만한 선물을 준비했다. 원석을 파는 상점에 들려 그의 사주에 따라 길한 색상인 남색 원석을 구매했고, 친구에게 너의 사주에 길한 방향인 동쪽에 두라고 전해주었다.

어제 그 친구는 스페인으로 떠났고, 공항에 잘 도착했다며 연락이 왔다. 나는 다소 극단적인 표현에 기분이 상했다면 미안하다고, 영어가 서툴러서 그랬던거니 이해해주길 바란다고 말했고, 그 친구는 그마저도 가볍게 농담으로 이어가 우리는 끝까지 호탕하게 웃으며 인사를 나누었다.

짧은 통화를 마치고 침대에 누워 그 친구의 맑은 눈과 밝은 미소를 떠올리다가 갑자기 눈물이 났다. 또 다시 이별의 시작이구나. 발리에서 만난 친구들과 이별을 하며 눈물이 난건 처음이었다. 짧지만 산뜻하고 즐거웠던 시간들에 대한 깊은 감사함과 아쉬움의 눈물이었다. 친구가 나에게 솔직해지는 법을 알려준 만큼 나는 내 감정에도 솔직해졌다.




6년 전, 처음으로 받은 심리상담에서 결론으로 내린 나의 취약점은 “거절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그시절 내가 거절할 때나 나의 부정적인 생각을 나누면 상대와의 인간관계가 끝날까봐 불안했다. 그리고 걱정이 극에 치달아서 아예 부정적인 생각은 나누지 못하는 내 성격이 스스로를 점점 내면 깊이 가두었다. 상담선생님은 심리상담처럼 글이나 머리롤 배운게 아니라 배운걸 바탕으로 경험을 여러번 쌓는 것이 해결책이라고 하셨다. 세상에서 닥친 불편한 상황에서 작은 거절을 해보고 이로 인해 인간관계가 망가지지 않는다는 경험을 쌓으라며 상담을 마쳤었다.

발리에 와서 혼자 온 여행자들과 짧은 기간동안 얕은 공감대로 인연을 맺을 때면 언제나 조마조마했고, 내 서툰 영어가 혹여나 실수가 되진 않을까 늘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래서 더 좋은 척하고 좋은 것만 말했다. 요즘은 길어지는 여행에 피곤한 몸상태가 지속되어 누군가를 만났다가 예민한 모습을 보이느니 자주 혼자 있는 쪽을 택했다. 그러다 몇일 전 홀로 방에 누워 지난 날의 심리상담을 떠올리며 변한게 하나도 없다는 생각에 조금은 울적해졌었다.


위험을 감수하는 것에 용감해지세요. 경험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나는 초반에 스페인친구를 무시하고 거절했지만, 우리는 정말 신기하게 계속 마주쳤다. 아무래도 나에게 솔직해지는 연습을 하라고 우주가 보낸 것 같다. 그리고 조금 위험을 감수하면 진짜 친구가 남는다는 그 친구의 조언대로 나는 그 친구에게 서툴게 솔직했지만, 그 친구는 나의 무례함을 가볍고 유쾌하게 넘기며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솔직함을 알려주고 경험시켜준 그 친구 덕분에 발리에서도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오늘밤, 주문 외듯 또 한번 내 좌우명을 마음에 새겨봐야지.

Just practice, like everything.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연습만 하면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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