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첫 스노클링을 하다!
우리는 울루와뚜를 떠나 시데만이라는 산골에서 이틀을 머문 후, 최종목적지인 뚤람벤(Tulamben)에 도착했다. 우붓에 지내면서 숙소도 구하지 못하고, 관광객에 치여 피로가 몰려올 때 즈음, 우연히 방문한 발리니즈 식당에서 주인과 짧은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는 50대 중후반 정도 돼보였는데, 어렸을 때만 해도 우붓이 얼마나 빌라가 없는 시골동네였는지 이야기하며 이제는 관광섬이 되어버린 발리의 과거를 회상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에게 관광객이 많지 않고 둘러보기 괜찮은 지역을 추천해 달라 했고, 그때 그가 언급한 곳 중 하나인 뚤람벤에 관심이 가 예약해 둔 곳이었다.
뚤람벤 Tulamben
발리섬의 북동쪽 해안에 위치해 일출이 아름답고,
발리에서 가장 인기 있는 다이빙 장소 중 하나.
호텔에 도착해 체크인을 하며 들은 안내 중 인상 깊었던 게 있는데, 호텔 내 수영장은 1.4m로 이어지다가 중간에 급격한 경사와 함께 2.5m로 수심이 바뀌니 수영할 때 주의하라는 점이었다. 아마 인기 있는 다이빙 스폿인 만큼, 다이빙 연습을 위해 그렇게 설계한 듯했다. 물을 무서워하는 나로서 가장 중요한 정보였기에 안내를 듣곤 수영장에 들어간다면 절대 벽 주위를 지켜야겠다고 다짐했다.
어렸을 때 수영을 배운 적이 있지만, 여전히 물속에서 힘을 빼면 저절로 몸이 뜬다는 걸 믿지 못한다. 긴장을 풀지 못하니 수심이 깊어져 목까지 물이 차오르면 공포감에 사로잡혀 몸은 물로부터, 마음은 공포감으로부터 헤어 나오느라 바빠진다.
호텔 수영장 너머 바다가 훤히 보였고, 사람들이 다이빙 강습을 받고 연습하거나 스노클링 하고 있는 모습이 자주 보였다. 잔잔한 파도가 치는 해안가를 바라보고 있으면, 얕은 파도가 칠 때마다 바닥에 깔린 자갈들이 “도로로로-“ 움직이는 게 보일 정도로 물이 참 맑고 깨끗했다. 바다를 좋아하고 수영을 잘하는 S는 당장 스노클링을 해야겠다며 호텔에서 마스크랑 스노클만 빌려서 바다로 들어갔고, 나는 멀찍이서 그의 모습을 구경하기로 했다.
들어가자마자 물 온도도 촉감도 딱 좋다며 “오, 쏘굿 쏘굿~”을 외치더니 어느새 바다와 한 몸이 되었다가, 그는 20분 후쯤 바다를 빠져나와 다시 호텔 수영장으로 돌아왔다. 내게 오자마자 잔뜩 흥분한 얼굴로 바닷속이 진짜 예쁘다며, 같이 보면 좋았을 텐데 혼자 봐서 아쉽다고 말했고, 바닷속을 구경해 본 적 없어 미지의 세상인 나는 그가 본 세상이 머릿속에 그려지지가 않았다.
내일은 마스크를 빌려 바다에 들어가 주저앉아서라도 꼭 바닷속을 구경해 봐야겠다고 다짐하며 첫날을 마무리했다.
일출시간에 맞추어 울린 알람을 끄고, 자연스레 다시 침대에 몸을 뉘이려는 찰나, 창 밖 너머 보랏빛과 붉은빛을 보이는 하늘을 보곤 재킷을 챙겨 바닷가로 나섰다.
나는 일몰보다는 일출이 더 좋다. 확장해서 말하면, 끝을 돌아보는 것보단 시작을 바라보는 게 좋다. 하루의 시작인 아침, 일주일의 시작인 월요일엔 “어떤 날들을 보낼까? 어떤 일들이 생기려나?” 기대하고 다짐하며 다가올 날을 기다리는 설렘이 좋다.
우리는 일출을 보고 아침을 먹자마자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마스크랑 스노클을 빌려 바다로 향했다. 인생 첫 아르바이트가 수영장 안전요원이었다는 S랑 함께 바다에 들어가니 크게 두려울 게 없었다.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S가 구해줄 거라 굳게 믿고 물속으로 들어갔다. 미지근과 시원함 사이의 부드러운 물 온도, 가까이서 보니 굴러가는 돌이 아주 맑게 보이는 게 S가 말한 대로 쏘굿쏘굿이 절로 나왔다.
스노클장비를 착용하고 바닷물 속을 들여다보니 이럴 수가,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찬란한 물 색, 큰 바위에 덮인 해초와 조개들, 헤엄치는 다양한 종류의 물고기들까지. 깊이 들어가지 않아도 이 정도를 볼 수 있다니 더 깊은 곳이 궁금해졌다. 무엇보다 내 눈으로 수심을 확인할 수 있으니 밖에서 바라볼 때 보다 훨씬 더 안심하고 즐길 수 있었던 것이다.
서서히 물속을 구경하는 걸 즐기는 나를 보더니 S는 조금씩 수영을 해보자고 제안했다. 그는 물 색이 연한 청록색에서 남색으로 변하면 깊은 곳이니 그쪽으론 들어가지 말 것만 기억하라고 말했다.
바닷속 세상은 바깥에서 바라보는 것보다 훨씬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발을 디뎌야만 해.’가 아닌 ‘바닷속을 보고 싶어’로 신경이 옮겨지니 몸은 자연스레 물에 떴고, 파도가 칠 때는 오히려 나를 해변가 쪽으로 밀어냈다. 다가가도 동요하지 않는 물고기들을 보며 힘을 빼고 흐름에 맡기는 법을 알아갔다.
발이 닿지 않으면 위험하다는 것, 파도는 나를 집어삼킬 것이라는 것 같다는 생각은 사실이 아니었다. 그저 나를 제한하는 머릿속 하나의 믿음이었다.
그동안 내가 두려워했던 건 뭐지?
파도에 휩쓸려 죽는 것?
이렇게 신비롭고 예쁜 바닷속을 보면서 죽는다면 그것마저 좋을 것 같아.
이런 생각을 하며 뚤람벤에 있는 동안 매일 홀린 듯 수영을 했다. 수영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 팔에 닿는 촉감이 부드럽고 탱글 하니 내 몸을 감싸는 기분이 참 좋았다. 바다수영이 이렇게 재밌는 거였다니!
작년에 혼자 발리여행을 할 때는 스노클링도 안 하고, 사람들이 보트 타고 돌고래 구경하자는 것도 거절했었다. 그땐 겁이 많아 다양한 경험을 하지 못하는 게 아쉽기도 했지만, 안 내키는 걸 억지로 할 이유도 없어 내키는 선에서 즐기고 왔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S와 여행하면서 믿을 구석이 생기니 평소에 혼자 하지 않는 것도 해볼 마음이 생긴다는 게 가장 큰 차이점이었다.
성인이 되고 인생에 책임질 나이가 되면서 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경계가 굳어질 즈음, 연애만큼 그 경계를 넓혀줄 소재가 있을까? 가족이 아닌 남이었던 사람인데, 어느새 그 사람의 세계를 경험하고 그로부터 무언갈 배우려는 마음을 낸다는 건 온전한 신뢰를 바탕으로 해야만 가능한 게 아닌가. 이래서 성인 이후에 가장 좋은 교육은 연애라고 하는 건가 싶었다. 이번 여행을 하며 내가 S를 매우 신뢰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고, 온전히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난 게 실감 나는 날들이었다.
매일 일출을 바라보며 하루의 시작을 기대했던 것만큼, 바닷 속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선물 받았던 뚤람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