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주이제 Apr 14. 2021

이 병신, 못 커도 이르케 못 커

할머니식 싸랑이란


"이 병신. 못 커도 이르케 못 커."


식물도 감정이 있어서 누가 저에게 욕을 하면 시들시들 맥을 못 추리고 칭찬과 애정어린 말을 하면 보란듯이 잘 큰다던데.


저에게 욕을 한 방 먹이더니 꿀 같은 영양제를 연달아 먹이는 할머니를 무어라 생각할까.


이 키 작은 식물은 욕은 욕대로 먹으며, 영양제는 영양제대로 어찌저찌 빨아먹고 있었다.


가만 보고 있으니 할머니가 계할머니는 아닌지 의심했던 어린시절이 스친다. 계할머니라는 개념이 가당키나 한건지. 그저 무서운 말 중에 제일 무서운 말이었던 계모에서 떠올릴 수 있는 두번째 무서운 말이었으니.


그만큼 나는 어렸던 거라.


보고, 듣고, 만지고, 먹어볼 수 없는 거라면 이 세상에 없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지금은 잠들 무렵 떠올리면 자꾸 미안하게 만드는 할머니식 싸랑을, 덜 자랐을 땐 없다고 믿었다. (병신같은 이름모를 풀에게 영양제를 꼽는 할머니식 사랑은 역시 사랑보단 싸랑이다.)


오색찬란 김밥을 싸온 유치원 친구들 사이에서, 나만 밥에 반찬 세 가지를 싸갔는데, 그날 따라 왼쪽 뺨에 자고 난 베갯자국이 벌겋게 나서, 선생님들이 적잖이 안쓰러워하며 나를 자기들 김밥파티에 끼워줬더랬다.


그렇게 유치원생의 감수성따위 고려하지 않은 할머니는, 대학 수능 때 미신따위 개나 준 미역국 도시락을 싸서 지금까지도 친구들 사이에서 웃긴 에피소드로 회자되게 했고,


백수 시절엔 이런 저런 기업 다 떨어져 하릴없이 늦잠을 퍼질러 자도, 가만 나가서 생닭을 사와선 명절에 삼촌한테나 해주던 닭도리탕을 끓였다.


못난 것에게 먹이는 할머니 싸랑이 고스란히 영양분이 되었을텐데. 언젠가 그 싸랑 없어질 때 나도 유령 캐스퍼처럼 흐릿해져버릴 것 같아 좀 겁이 난다.


이런 말 하면 할머니가 언제고 '지랄하네'라고 하면 좋겠다, 고 생각한다.


그러니 이름모를 풀아.

웰컴홈. 너는 잘 자랄 수밖에 없을거야.



이전 03화 인생은 할머니처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