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주이제 Jun 23. 2021

아재개그 말고 손녀개그

의외로 웃음 장벽이 낮은 할머니


 나는 남을 웃기는 데 별 소질이 없다. 웃긴 이야기가 클라이맥스로 치닫기도 전에 먼저 웃어버려서 시시하게 의도를 드러내고 마는 케이스다. 이런 나와 달리, 우리 할머닌 웃음기 하나 없이 완벽하게 사람들을 웃길 줄 안다.


  대화 경력이 십수 년에 달하는 우리 할머니는 동네 할머니들의 특징을 완전히 간파하고 있다. 할머니가 동네 할머니들과의 대화를 이야기로 옮기다 성대모사로 전환하는 순간을 나는 고대한다. 동이나 호수로 서로를 구분하는 할머니 세계가 매번 헷갈리는 나는 할머니의 성대모사를 통해서야 마침내 그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웃어버리지 않게 입술에 힘을 꽉 줘가며.


 한편 할머니의 무심한 감상은 허를 찌른다. 가령, TV 채널을 돌리다 지나간 채널에 <전원일기> 나왔을  할머니가 하는 말은 11 할머닌 저걸 환장을 하고 ,   거를. 같은 것이다. 20년간 방영했다는 전원일기를 이미   11 할머니의 인생 경력이 새삼 놀라움과 동시에, 요즘 사람들은 존경스럽게 생각하는 국내 최장수 프로그램이거나 말거나, 봤던   보는 모습을 환장한다고 표현하는 할머니의 시니컬함은 참으로 귀하다.


  번은 장민호와 동원이가 나오는 사랑의 콜센터를 보던 할머니가 역주행이라는 것의 개념을 대강 알게 되었다. 주말에 가족들과 <놀면 뭐하니-MSG 워너비 > 보다가 할머니가 말했다. 가수들은 누가 자기 노래 부르면 좋아해  유명해지면  벌잖아, 남진이도 누가 자기 노래 부르면 엄청 좋아해.  밖에도 할머니는 내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에 흥했던 옛날 '탈랜트' 근황을 묻는다. 요즘 누구 티비에  나오지? 무슨  있나?  사람 누구 아들 아니냐? 하는  나는 힘이  빠지고 웃음이 난다.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할머니.


 매번 아무렇지 않게 가족들을 웃기는 할머니는 집에서보다 밖에 있을 때 유난히 잘 웃는다. 바람이나 바깥 냄새 같은 것이 할머니를 웃기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길에서 보는 할머니는 늘 웃음을 띠고서 무슨 얘기를 재밌게 하고 있다. 이 동네 사람들이 확신할 할머니의 정체성은 딱 저 모습일 것이다. 참견 많고 잘 웃고 종종걸음을 걷는 할머니.


 지대가 낮고 시장 가까이에 있는 우리 아파트에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많이 사시는데, 하루에 두 번 정도 나무 아래 벤치에 모여서 세상만사 대화 주제를 마음껏 넘나든다. 하루는 신기시장의 화재 사건이 화두였다. 동네에 사이렌 소리가 무자비하게 울려 퍼진 적이 있었다. 이 동네의 중심부에 있는 신기시장의 어느 가게에 불이 붙은 것이다. 시간이 지체될수록 마음을 후벼 파듯 아찔한 사이렌 소리에 모두가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이윽고 소리가 잦아들자 우리 할머니는 시장 점검에 나섰다. 횡단보도를 건너려던 할머닌 마침 시장 쪽에서 걸어오던 3층 할머니와 마주쳤다. 두 할머니는 나란히 나무 아래 벤치로 향했다. 역시나 할머니들이 모여 시장의 화재 이야길 하고 있었다. 3층 할머니는 자신이 보고 들은 것들을 신나게 늘어놓았다. 천만다행으로 누구도 인명 피해를 입지 않았고, 화재를 입은 가게도 금방 복구가 가능한 수준이었단다.


 따닥따닥 붙어있는 가게들이라 더욱 위험한 상황이었기에, 금방 진압된 것이 기적과도 같았다. 할머니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신기하네! 3 할머니가 놓칠 새라 바짝 뒤이어 말했다. 그러니까 신기시장이지 신기하니까! 이후에 할머니들 반응이 어땠는진 모르겠으나 그중  할머니가 유독 감명을 받은 듯했다.


 할머니는 넘실넘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와 가족들에게 신기시장의 상황을 전해주었다. 나는 말했다. 다행이다, 신기한 일이네. 그러자 할머니의 입꼬리가 벌써부터 꿈틀거렸다. 그러니까 3 할머니가 그러잖아 신기하니까 신기시장이지! 뜻밖에 할머니의 낮은 웃음 장벽을 발견한 나는, 맘대로 제어가 되지 않는  입꼬리의 근원지까지도 확실히 알게 되었다. 할머니 옆얼굴을 보니 아직도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가 있었다.


 지난주였다. 입사 지원 하나를 마무리하고 찌뿌둥하게 방을 나오는데, 고소한 냄새가 콧속을 간질였다. 싱크대 밑에서 뭔가와 씨름 중인 엄마와 할머니가 보였다. 커다란 대야 두 개 가득 흙 같은 것이 담겨 있었고, 엄만 그걸 적당히 옮겨 믹서기에 넣고 있었다. 나는 엄마와 할머니 곁에 철퍼덕 앉아 참견하기 시작했다.


 대야 안에 담긴 것은 볶은 들깨였는데, 엄마와 할머니는 이것들을 손수 믹서기에 갈아 들깨 가루를 만들고 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들깨를 콕콕 찍어 먹고 있던 할머니를 보고 맛있냐고 물으니, 할머니와(그냥 그렇지 뭐-) 엄마가(맛있어 먹어봐-) 동시에 대답했다. 톡 톡 터지는 식감과 입안을 맴도는 고소함이 중독성 있었다.


 할머니는 엄마가 막 믹서기에서 갈아낸 들깨 가루를 유심히 보다가 어떤 치명적인 결함을 발견한 듯 인상을 찌푸렸다. 덜 볶은 들깨가루와 잘 볶은 들깨가루는 갈았을 때 색깔과 촉촉함의 정도가 달랐는데, 할머니는 그것이 도무지 맘에 들지 않았다. 손으로 조심조심 그 경계를 나누던 할머니는 덜 볶인 들깨가루를 다시 한번 갈아야겠다고 선포했다.


 어휴, 이런  하겠다고 내가  신세를 볶아- 뭔가 귀찮아질 낌새가 보일  할머니가 흔히 내뱉는 푸념이다. 무릎을 껴안은  야금야금 들깨 가루를 찍어 먹던 나는 별안간 할머닐 웃기고 싶어졌다. 볶은 들깨가루를   씹으며 리듬감을 주어 말했다. 들깨도 볶고 신세도 볶고- 먼저 웃음이 터진  엄마였다. 입을  다물고 있던 할머니도 단전에서 올라오는 웃음 때문에 미간을 펴야 했다. 순간 들깻가루에 둘러싸여 신세를 볶던 할머니는  멀리 사라지고, 그저 바지 위에 떨어진 깻가루를 바지런히 터는 할머니만 남아있게 되는 고소한 저녁이었다.


 할머니만 보면 잘 보이고 싶어 갖은 수를 두는 착한 남자친구에게 일러줘야겠다.


 있잖아. 우리 할머니 아재개그 좋아해.



 

 

이전 05화 할머니와 호동이와 튼튼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