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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이제 Aug 25. 2021

관성의 여인





 마음이 덜 마른 빨래처럼 묵직하고 축축해지는 날, 다리미처럼 나를 펴는 할머니의 관성.


 문득 아주 연약해져 손에  쥐었 지폐처럼 흐물흐물하고 고릿고릿해질 . 아주 옅은 어둠에도 쉬이 의욕을 잃고 아주 가벼운 상상에도 광광 심장이  .  거실에 모로 누워 있는 할머니가 그리워진다.


 베란다 쪽으로 머리를 두고 방석을 반으로 접어 받치고 있는 할머닌 내 기척을 느끼자 묻지도 않은 티비 속 장면을 설명한다.

 

 할머닌 동거인 감지 센서라도 있는지 방문을 열거나 거실로 나오는 가족의 인기척을 백발백중 기가 막히게 알아채고 자동문처럼 입을 연다. 나의 세상에서 가장 오래도록 가장 당연한 존재인 나의 할머니에게서 가장 평온한 말소리가 흘러나온다.


 그럴 때, 정수기에서 미지근한 물을 두어 컵 받아 마신 뒤 할머니 발치에 있는 캠핑 의자에 가만 앉는다. 한 번 자동문을 연 나의 할머닌, 간만에 연 문을 닫지 않을 모양으로 분명 같이 보고 있는데도 장면마다 자막 같은 부연 설명을 빼먹지 않는다.


 일분일초가 궁금한 프로그램을 볼 때 이런 할머니의 1초 재방송이 그렇게 성가실 수 없지만, 그냥 기운이 다 빠져버렸을 땐 할머니의 단조로운 말소리가 수액처럼 몸속으로 흘러들도록 내버려 둔다. 가끔 할머니가 멋대로 해석한 장면을 고쳐 말어 고민하다 그냥 응, 응 하기로 하며.

 



 9개월째 이어지고 있는 취준생의 삶은 놀랍게도 스펙타클하다. 사건과 감정의 뒤죽박죽. 몇 시간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울퉁불퉁한 가능성 덩어리.

 이렇게 풀어쓸 수 있겠다.


 저요,
 
 제가 뭣도 아니지만 어제는 어떤 면접 제의를 거절했고요, 오늘은 감히 그곳에 지원해 보았어요. 어떤 회사를 알아보는 단계에서 호감과 동경이 피어오를 때가 있는데 설렐 수 있어 다행인 것 같아요. 자기소개서가 호소문이 되지 않도록 감정을 주체하기가 은근히 어려워요. 낮 시간에 바깥을 돌아다닐 수 있는 거, 지금이라 가능한 행복인데 즐겁지 못할 때가 많아요. 다 잘 될 거라는 지인들의 말에 아직 마음이 동하는 내가 좋았어요. 좋아하는 친구들과 오랜만에 밥을 먹으며 철저히 돈 계산을 하는 내가 싫었어요. 생일이 끼어 있는 달에 엄마가 말없이 용돈을 더 얹어주는 게 유난히 속상했어요.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래사장에 박힌 조개껍질처럼 부스러지고 구멍이 나고 유난히 빛나기도 때깔이 곱기도 한 사건들이 알알이 일상에 박혀있는데 그래서 뭐? 라고 묻는다면, 아직 백수라고요 라고 일축할 수밖에 없는 하루 이틀 사흘 나흘.


 그럴 때 존경하다 못해, 거의 필요로 하게 되는 것은 아주 오랫동안 같은 삶의 종적을 밟다 이제는 하나의 궤도처럼 되어버린 관성 안에서 하나의 행성처럼 가벼이, 유유히 시간을 보내는 사람 곁에 있는 일이다. 그런 사람의 모양은 아주 빠릿하고도 느긋하다.


 바로 지금 수십 년 동안 같은 궤도를 그려온 관성 속에서 유유히 시간을 지나는 할머니와 한 공간에 있다. 당연하고 당연한 일들의 연속인 할머니의 안정적인 일상에 숨어들고 싶은 날. 나는 늘 그렇듯 두부나 우유, 파프리카, 오이, 방울토마토 중에 하나를 사러 시장을 찾는 할머니의 짐꾼을 자처한다.

 

 3초면 완성인 외출 복장, 주머니가 열두 개쯤은 달린 땡땡이 가방에서 각기 다른 곳에 넣어 둔 시장 상품권과 현금 지폐를 척척 꺼내는 비상한 두뇌를 가진 관성의 여인.


 여인은 역시나 그 양산을 쓰고 역시 그 걸음걸이로 역시 그 샛길로 걷다 두어 번쯤 남에게 말을 걸기 위해 멈춰 선다. 그를 지나치고 나서 갑자기 말소리를 확 줄여 부연 설명을 덧붙이기를 완수한 뒤, 걸을 때 몸이 거적데기같단 말로서 짐꾼의 염려 섞인 반응 듣기도 빼놓지 않는다. 아, 두부 한 모를 사러 들른 곳에서 주인아줌마에게 '우리 손녀.'라는 짧고 굵은 설명을 덧붙인 것은 이례적이었지만.




 가까이서 본 할머니는 가게를 나설 때마다 꼼꼼하게 거스름돈을 계산했다. 건조한 손바닥 위에 거스름 동전을 펼쳐놓고 휙 휙 제껴가며 셈을 해보고서야 주머니에 넣었다.


 할머니는 검은 봉다리를 척척 받아드는 내가 있어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아직 집에 있는 것들도 아예 사놓아야겠다며 야채 가게로 향했다. 다리에 힘이 없어 둥실둥실, 휘적휘적과 비슷한 모양으로 걷는 할머니는 사람으로 와글와글한 야채 가게에 도착하자 그 안을 옹골차게 휘젓고 다녔다.


 태엽을 감았다 푼 듯, 망설임 하나 없이 기운차게 걷는 할머니 모습에 구겨졌던 마음이 참외 여섯 알을 담은 검은 봉다리 손잡이처럼 팽팽해졌다.


  할머니 말마따나 꼿꼿하던 걸음걸이가 휘청휘청과 가까워지는 동안 짙어진 할머니 삶의 관성.


 함께 집에 돌아와 불룩한 비닐봉다리 여럿을 식탁 위에 올려놓고 있는데 할머닌 그새 바닥에 지폐들을 펼쳐놓고 교회에 낼 헌금용 지폐를 구분한다. 때묻고 구겨진 지폐들 사이에서 비교적 깨끗하고 덜 구겨진 지폐가 할머니 왼편에 하나 둘 쌓인다. 한편 오른편엔 5천 원짜리 지폐가 착착 쌓이고 있다. 가끔 엄마가 만 원짜리와 바꿔달라고 한다며.


 나도 그렇게 착착. 척척. 눈 감고도 구분하고 셈할 수 있는 땡땡한 일상을 꾸리고 싶어졌다. 하찮은 패배감이나 실망감일랑 비집고 들어오지 못하게 땡땡한 일상의 궤도를 빠릿하고 느긋하게 지나고 싶어졌다.


 유감스럽게도 지금의 내 일상은 예측불가한 외부 요소가 자주 침입하곤 하나, 이 또한 언젠가 완전한 궤도를 만드는 데 일조하는 과정일 터. 그때까지 할머니의 널찍하고 안정적인 궤도 속으로 뛰어들어 제철 과일이며 야채 봉다리를 팽팽히 들고 여인과 함께 집에 돌아오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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