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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이제 Jul 29. 2021

한여름의 린다 킴

할머니가 캘리포니아에 살았더라면



 날씨가 너무한 날에 할머니의 수명이 줄어드는 모습을 목격한다. 너무하게 더워서, 너무하게 추워서, 너무하게 해가 내리쫴서, 너무하게 비가 쏟아져서 할머니의 기동성을 낮추고 마는 고약한 날씨. 요즘 할머니는 홈키파를 직방으로 맞은 모기처럼 맥을 못 추리고 솜이불 위에 누워있다.
 

 오랜 세월 척추 협착증을 앓고 있는 할머니는 하루 세 번 같은 약을 복용한다. 약에 의존하게 될까 봐 어떻게든 참고 참아서 하루 세 번이라 약이 없으면 살 수 없을 거라고, 할머니는 말한다. 아침 10시, 오후 3시, 밤 11시에 약을 먹는 할머니가 아침 9시, 오후 2시, 밤 10시에 짓는 표정을 보면 그 말이 과장이 아님을 알게 된다.


 혈관에 약이 돌지 않을 때 할머니의 몸 어딘가가 끈질기게 저려온다. 뒤통수부터 허벅지까지 살이 저리는 지긋지긋함을, 아무리 더워도 찬 공기를 쐬는 것은 고역인 갑갑함을, 약이 아니고서 견딜 수 없는 우울함을 나는 알지 못한다. 할머니가 시간을 견디는 동안, 우리가 고통을 손톱만큼도 나눠가질 수 없는, 완벽한 타인이라는 사실만 거듭 확인한다.


 약을 먹고 한 시간 정도 지나면 할머니는 필라멘트에 불이 켜지듯 반짝 살아난다. 그럴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익숙한 동선으로 집안 곳곳을 훑는 일이다. 목소리에 힘이 생긴 할머니가 미뤄둔 잔소리를 빠짐없이 풀어놓으면 나도 비로소 밖에 나갈 채비를 한다.


 적당히 좋은 날씨는 약효를 연장한다. 맛있는 음식도, 용돈도, 삼촌도 할머니 컨디션을 더 좋게 만들 수 없는 것을 자연만이 예고 없이 해낸다. 할머니가 무심코 '이 정도만 같아도-' 라고 말하는 날에 창에 비친 바깥 풍경은 여지없이 선명하고 잔잔해 집에 있기 아까운 날씨를 자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마저도 보기 어렵게 되고 있다. 환경 오염과 지구 온난화로 한여름과 한겨울이 비대해지고, 살 만한 날씨는 금새 사악한 날씨가 되어 할머니에게 싸움을 걸어온다. 할머니의 삶의 질을 좌우하는 것이 날씨라면 여기가 아닌 어디어야할까.


 사계절 기후가 온화해 할머니가 '견뎌야 하는' 날의 수가 일 년 중 4분의 1도 되지 않는, 내가 잠시 머물렀던 캘리포니아가 떠오른다. 솜이불 위에서 부채질하는 할머니를 잠시 캘리포니아의 한 중소도시로 옮겨본다.


 아침마다 스프링클러가 돌아가는 드넓은 잔디 마당에, 야자수 그늘이 드리운 아담한 집에, 활발한 천성을 마음껏 발휘해 동네 사람들에게 확실히 눈도장을 찍는 린다 킴. 이었으면 할머니의 종아리는 지금보다 더 단단했을까. 굵은 주름이 자리한 곳은 미간이 아니라 눈가였을지도 모르겠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여름에도 그늘이 제 역할을 톡톡히 하는 곳이라 4월부터 10월까진 날씨와 더불어 즐겁게 지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다, 해외여행은 고사하고 집 놔두고 외식하는 일의 무쓸모를 주창하는 할머니를 떠올리니 미간 대신 눈가에 주름이 진 린다 킴이 킥킥 웃는다.


  점점 더워지고 추워지는 극단적인 기후 속에서 흠 없이 맑은 날의 희귀함을, 그 귀함을 알아간다. 린다 킴은 어떨지 몰라도 김종희 할머니는 맑은 날을 제대로 누린다. 아파트가 주황빛으로 물들 무렵 반갑게 부는 바람을 놓치지 않고 칭찬한다. 희미하던 식욕을 내비치거나 평소보다 느긋하게 동네를 걷기도 한다. TV를 볼 땐 지치지도 않고 장면마다 질문을 던지며 아주 사소한 우스운 일도 모른체 하는 법이 없다.  


 미운 날씨를 소매로 닦아가며 참을성 있게 맑은 날을 기다리는 삶은, 린다 킴 말고 온전히 김종희 할머니의 것이다. 비행기를 타고 캘리포니아 중소도시에 머물 수고는 마다하겠다. 식어가는 저녁 공기 속에 할머니만의 여름이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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