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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이제 Jan 03. 2022

백수를 졸업하며

할머니와 가장 친밀했던 아홉 달을 마무리하며


최종 합격 통보를 받았다. 02, 로 시작하는 번호를 보자마자 방으로 뛰어가 문을 꼭 닫았다. 숨 죽여 통화 버튼을 눌렀다. 전화 너머의 회사 인사팀이 뜸 들일 것을 예상하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이런 나와 상반되게, 달뜬 목소리의 상대는 머뭇거림 하나 없이 합격 소식을 전해왔다. 내 목소리는 출근과 관련한 기본적인 숙지사항들을 들으며 여러 번의 '네'를 거쳐 평소의 어조를 찾았다. 너무 오랜만이라 거의 처음인 듯 느껴지는, 상처 하나 나지 않은 퐁실한 안정감이 나를 천천히 그러안았다.

출근까지 남아 있는 낮의 수를 헤아려보며 거실로 나왔다. 9개월 내내 보아 온, 그리고 내가 참여해 온 우리집의 낮 풍경이 그려지는 듯 했다. 거기엔 요란한 무늬가 그려진 면티를 입은 할머니, 오래 써서 색이 다 바랜 장판 모양 매트, 그 위의 요철과 굴곡을 낱낱이 밝히는 기다란 늦여름 햇살과, 맨얼굴로 자주 물을 마시며 할머니가 사 온 장바구니에 애써 관심을 갖는 내가 있었다.

9개월간의 백수 생활을 끝내고 출근을 앞둔 나에게 할머니가 가장 먼저 한 말은, 회사까지 얼마나 걸리냐? 였다. 곧 죽어도 서울로만 면접을 보러 다니는 내가 지쳐 보였는지 할머니는 도대체 인천에는 왜 회사가 없느냐고, 그 많은 인천 사람들이 다 뭘 먹고사는 거냐고 끌탕을 했었다.


당장 다음 주 이 시간에 그토록 바라던 '정해진 일상'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지는 해가 마음을 더욱 간질여 나가지 않고 못 배길 것 같아 주섬 주섬 옷을 챙겨 입고, 신발에 발을 막 구겨 넣는데 아, 한 가지 명백한 사실 하나가 씁쓸하게 떠올랐다.


방금 한 시절이 막을 내렸다. 하루 최소 두 번 뭘 먹을지 정해 한 상을 차려내야 했던 우리의 생과 직결된 토의가, 그리고 그 안에 성실하게 담기곤 했던 저렴하고 실한 제철 음식들이, 관심사는 달라도 서로의 말을 들어보려 애를 쓰며 함께하던 시절이, 그 어느 때보다도 가장 동거답던 우리의 한 때가, 이것으로 막을 내렸다.


다른 때보다 유난히 사랑스러워하거나, 애틋하지는 못했어도 시간이 되면 같이 밥숟갈을 뜨는 게 당연지사인 것으로 알고, 할머니가 어딜 나가는지 내가 무엇을 하는지 서로가 서로의 하루를 꿰뚫고 있으면서도 집을 나서고 들어오며 빼먹지 않고 기척을 내주었던 동거인 사이의 편안한 룰이, 이제 자유를 얻는다. 앞으로 바쁘거나 피곤하다는 이유로 하지 않아도 될 말은 삼키고 시간을 내 발치에 앉아 얘기를 주고받는 일은 낯간지럽고 새삼스러워지겠지.


내 본거지는 언제나 지금 우리집이었으니 평생을 할머니와 살아왔다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우리가 한 집에 살아온 것이지, 함께 정말로 동고동락해 보았나? 누군가 묻는다면, 내가 그간 내 동거인을 얼마나 헐겁게 알아왔으며 얼마나 단편적으로 생각해왔는지를 깨달을 만큼은 동고동락해본 것 같다고, 그렇게 느꼈던 겨울부터 늦은 여름까지 우리는 한 공간에서 참 많이 애써왔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패턴이라고 없는 일상에 타격이 있을 때마다 멋대로 쉼을 가장한 방치 상태를 지속할 때마다, 착실한 할머니의 장바구니들을 보면서 정신을 차렸던 것 같다. 뜻대로 되지 않는 날만 이어지던 나를 위로한 것은, 유난한 희망메세지가 아니라 에휴 공부만 자꾸 해서 어떡하냐던 할머니 말이었다. 내가 그렇게 듣기 버거워하던 할머니의 근심 걱정하는 말이었다.


우리의 쓸쓸하고 시끄럽고 다정했던 시절에 안녕을 고하며 글을 맺는다. 동고동락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기란 손바닥을 뒤집듯 쉽고 간편하겠으나 그러지 않기로 한다. 할머니가 하는 말들을, 대부분 근심 걱정일 그 말들을 알고도 자청해 들으며, 작아진 눈을 몇 초간 들여다보다 먼저 웃을 줄 알며, 언젠가 또 뒤통수를 맞듯 생경한 모습을 발견하더라도, 너무 많이 놀라거나 실망하지 않기를 바라. 원래부터 다채롭던 너의 유일무이한 동거인임을 기억해내길 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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