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주이제 Aug 10. 2023

평균의 프레임




지구가 둥글다고 하지만, 실상 지구의 표면을 보면, 산도 있고 계곡도 있기 때문에 매끈한 형태의 구는 아니다. 그럼에도, 지구를 '구'라고 부르는 이유는 평균 때문이다. 여기저기 울퉁불퉁한 부분이 있더라도 평균적으로 보면 지구는 둥글다. 사람을 보는 우리의 눈도 그래야 한다.


출근길 만원 지하철에서 아주 천천히 그리고 여러 번 읽은 책 속 문장. 자주 울퉁불퉁한 나는, 이 문장을 통과할 때마다 동글동글하고 앙증맞은 탱탱볼로 변신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 지구가 둥글지 않아서 고맙고, 그럼에도 둥글다고 부르는 '평균'이라는 개념에도 고마움을 전하고 싶을 정도다.


자주 예민하고, 매사에 부정적인 할머니는 종종 가족들의 기운을 쏙 빼놓는다. 한편으로 우리들이 할머니와 함께하고 싶은 것이 많다는 반증이다.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간에, 함께하고 싶은 것에 욕심이 날수록 말에 힘이 들어가고, 그럴수록 할머니는 더욱 '그대로' 있고 싶어 한다. 무슨 여행이냐 집에서 테레비로 다 볼 수 있는데. 무슨 외식이냐 냉장고에 먹을 게 산더민데. 무슨 옷이냐, 무슨 신발이냐 죽고 나면 다 소용없는데. 하는 식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자주, 촘촘히 가족을 챙기는 것도 할머니다. 집안 어느 곳을 둘러봐도 할머니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물을 머금은 스펀지로 만들어진 바닥을 맨발로 걷듯, 어느 쪽을 향해 걸어도 뜨듯한 마음이 발바닥에 푸욱 묻어 나오는 식이다.


'곧 있음 다 차겠는데'싶은 내 책상 위 작은 휴지통은 회사에 다녀오면 어김없이 말끔히 비워져 있고, 책상 위를 나뒹구는 머리끈이며, 떨어진 단추며, 클립 같은 잡동사니들은 출처를 알 수 없는 어느 종이상자 안에 얌전히 담겨있다. 가족들이 잘 먹는 계절 과일과 야채를 단 한 번도 떨어지지 않게 사놓고 다듬는 것도 할머니다. 예민하고 조심성이 많은 할머니 성격으로 인해 신문지와 비닐봉지, 작은 그릇들이 안전장치처럼 곳곳을 차지하고 있다. 감성을 챙기려야 챙길 수 없는 할머니만의 실용적 취향이 어디서나 티를 내고 있다.


그러니까, 할머니는 자주 가족들의 맥을 빠지게 만들지만 평균적으로 가족에게 헌신적이며, 가끔 지나친 걱정으로 상대방의 속을 뒤집어놓지만 평균적으로 견딜 만하다고 퉁칠만한 정도다.


우리의 둥근 지구가 정확히는 뾰족하고 높은 산과, 아찔하게 깊은 계곡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보다, '지구는 둥그니까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면 온 세상 사람들을 만날 수 있겠네'싶은 다소 게으른 낙관이 중요한 때가 있다. 해가 갈수록 고독한 나이가 되는 할머니와 함께 살아가는 일도 이와 비슷하다.


이전 12화 호불호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