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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이제 Jul 31. 2023

호불호


우리 집에서 '할머니의 언어'라고 부르는 할머니만의 독특한 화법이 있다. 원하는 바가 있더라도 티 내는 법이 없고 돌려 말하는 것. 단, '불호'에 관해서라면 깔끔하게 직설적이다.


이로 인해 우리 가족은 할머니의 '호'를 찾아내는 나름의 노하우를 터득했다. 같은 질문을 서너 번 정도 던져보고, 그렇다 또는 아니다 중 어느 쪽으로도 수긍함이 없다면 그게 바로 '호'인 거다.


점점 쇠약해지는 몸 때문에 좀처럼 무엇을 먹고 싶어 하지 않는 할머니를 두고, 우리들은 할머니의 숨겨진 '호'를 찾고자 부단히 애를 쓴다. 가족들이 다 함께 모이는 주말 저녁 무렵이면 할머니에게 이런저런 음식의 이름을 던져본다.


그런 할머니에게서 반가운 '호'를 끌어낸 건, 다름 아닌 나의 남자친구였다.


나에겐 9년 동안 연애 중인 남자친구가 있는데 우리는 잠시 헤어졌었다. 헤어진 다음의 나는 그저 시간이 지나기를 기다렸고, 2개월이 지났을 즈음 가족들에게 알렸다.


엄마는 나의 통보에 그 어떤 설득도 내비치지 않고, 그저 매일 저녁을 함께 걸어주었다. 엄마의 그런 무던함이 헤어진 후 내내 불안에 시달리던 내 마음에 숨통을 틔워주었다. 엄마는 늘, 이런 식으로 나를 자유롭게 한다.


할머니는 헤어짐은 응당 누군가 잘못한 놈이 있다고 생각하는 듯, 계속해서 문제의 원인을 알아내려 했다. 원인이 있다면 나의 굳지 못한 심지가 원인이었다. 끈질기게 질문을 던져오던 할머니는 내 모습에서 아무런 여지를 찾지 못했고 질문도 거기서 멈췄다.


할머니는 내 남자친구를 퍽 좋아했었다. 남자친구를 향한 할머니의 '호'는 그 애가 우리 집에 들렀다 가는 순간에, 아주 잠시 인사를 나누고 난 다음에, 엄마에게 그 애가 왔었더라고 전하는 할머니의 평이한 후기에도 뚝뚝 묻어났다. 그러나 할머니는 그 애와 이미 끝을 내고 난 나에게 더 이상의 말을 덧붙이지 않아 주었다. 나는 철없게도 그 모습이 할머니답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그 애와 4개월 만에 만남을 이어 붙였다. 이번에는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아 가족들에게 이 일을 알렸다.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할머니에게 내 남자친구 잘생겼지 않냐고 물어보면 할머니는 코웃음도 치지 않고 '잘생기긴 뭐가 잘생겨'라고 말했었다. 그렇게 빈말을 할 줄 모르는 할머니인데, 이후에 엄마가 TV에 나오는 축구선수를 보고 그 애와 닮지 않았냐고 말하자 할머니는 밥술을 뜨다 말고 유심히 보더니 그 애가 더 잘생겼지 않느냐고 말해 가족 모두를 빵 터지게 만들었다.


할머니의 입에서 긍정언어가 나오다니. 내 마음이 모호해 그 애와 헤어져있는 동안, 할머니는 자신의 몇 없는 '호'에 대해 말하는 즐거움을 누리지 못했었겠구나. 좋은 것도 좋다고 말하지 않는 할머니가, 누가 들어도 명확한 '호'를 발설한다. 4개월 간 잠시 잃어버렸던, 그러나 9년을 함께 해온 남자친구 덕에 할머니는 반갑고 좋을 때 이렇게 말하는구나, 를 확인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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