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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년필 May 13. 2022

눈동자 속 수천 개의 빛깔

파랑

 바람이 느티나무 잎사귀 위에 흐르는 음영 조각을 섞는다. 비 웅덩이가 밤새 개어버린 하늘을 주워 담는다. 어젯밤에 사글사글 내리던 봄비가 개고 땅은 아직도 빗속에 서 있던 순간에 머문 듯 말이 없다. 햇빛 속에서 고요하게 빛나는 풀잎들 사이로 거미줄이 거닐었다. 그 위에 맺힌 어제의 비가 수만 가지 빛깔을 담고 있음을 보았다.

 짙은 파랑, 하양. 둘을 섞어서 무수한 파랑을 만든다. 그중 한 가지의 파랑은 하늘과 닮아 있기를 빌며. 하양 위에서 시작한다. 캔버스의 규칙적이고 오돌토돌한 면 위로 새끼손가락이 스치면서 사스삭 소리를 낸다. 그 소리가 어제의 봄비를 닮아 고요했던 것들이 고개를 들고 웅성거린다. 바람 소리가 화답한다. 그러는 사이, 손은 다시 한번 캔버스 위를 달린다. 그렇게 빈 하늘이 담겼다. 손은 다시 한번 물감을 섞는다. 하양, 초록. 초록색 물감이 햇빛에 부딪혀 밝게 타오르지만 손은 무심하게 하양과 섞어버려 그 빛의 조각을 어지럽힌다. 노랑을 더해 흙빛 초록을 빚고 파랑을 더해 어둠 속에 웅크린 초록을 빚는다. 붉은 붓 손잡이의 매끄러운 면에 햇살이 닿아 둥근 원을 그리며 떨군다. 손은 그 둥근 빛의 흔적이 거미줄을 닮았다 생각한다.

 하늘은 매 순간 더디지만 하염없이 변했다. 구름이 스치고 밀려나고 할퀴어 갈라졌다. 숲은 손을 하늘로 뻗으며 아우성쳤다. 누군가는 손짓했고 누군가는 잎사귀를 던져 올렸다. 햇살의 물결이 방향을 바꾸었다. 손은 모든 움직임을 담고 있었다. 나무들의 움직임이 햇빛의 달라진 물결에 의해 옅은 빛으로 덧칠해졌고 흩날리는 구름 조각은 얼룩처럼 그려졌다. 햇살의 물결은 비가 세상에 씌우는 한 곂의 우수처럼 나지막이 흔들리고 있었다. 손은 마지막으로 붓에서 떨어졌던 햇살의 문양을 그려 넣었다. 둥글게 퍼져나가는 모습이 빗방울이 만들어낸 울림의 흔적과 닮게 퍼져나갔다. 붉은 붓을 쥔 손이 캔버스 끝을 달렸다. 이번엔 손가락을 떼어 공중을 미끄러지듯이 달렸다. 그리고 나서야 한숨 쉬듯 붉은 붓을 내려놓았다. 그녀의 눈이 다시 풍경을 만났다. 모든 순간들은 그림 위에 있었다.

 수평선이 하나 있다. 바다가 펼쳐져 있고 밀물과 썰물이 드나드는 곳이다. 썰물 때는 자박자박 걸을 수 있다. 어떨 땐 해가 높이 떠서 마른 진흙 위를 걸을 수도 있다. 그러나 파랑이 차오르는 날도 있다. 밀물이 밀려들 때. 처음에는 걷기 힘들다. 진흙이 발을 삼키고 잡아당긴다. 그러나 물이 쏟아져 들어 가슴 위로, 목 위로 기어오르면 두려움을 느낀다. 추위가 살갗 속을 기어간다. 그리고 더 이상 못 견딜 것이라고 생각 들 때 썰물이 모든 것을 끌어당긴다. 추위가 가라앉고 목을 조여오던 물살이 그 손을 놓는다. '나의 바다 위를 걷는 길, 그리고 그 속의 파랑을 우울이라 부르나 보다.'

 그림을 바라보면 왠지 누군가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는 것 같다. 그 시선 속에서는 시간도 어떤 흐름도 없이 존재만 남는다. 밤이 남기고 간 어스름처럼 소리 없이 서로를 관찰한다. 그 시선 속에선 가장 본질만 남는다. 그녀는 수평선 위를 걷는 것이 자신의 그림을 보는 것 같았다. 거울 위에 비춘 그녀의 눈동자는 짙은 갈색이었다. 어디선가 쪽빛이 날아들어 그녀의 눈동자를 냇물처럼 흔들고 수천 개의 조각으로 빛나게 했다. 흩날리던 눈동자 속 빛의 조각들 속에서 그녀는 파랑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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