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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년필 May 18. 2022

유리 소녀, 무지한 백지, 사과나무 소년

1. 유리 소녀

 무지한 백지는 거울을 붙잡고 미친 사람처럼 소리쳤다.

 “네가 뭘 했다고 그렇게 무기력해! 네가 죽을 것처럼, 네 영혼을 가루로 만들어 버릴 것처럼 무언가에 쏟아본 적 있어? 네가 노력을 한 적이 있어? 살아보려고 한 적이 있어?” 그렇게 소리를 치던 그는 갑자기 고요해지더니 거울을 도로 흰 벽 위에 돋아난 못에 걸어 놓았다. 하지만 그가 진실로 그 못 위에 거울을 걸었는지 그의 텅 빈 눈빛을 걸었는지 유리 소녀는 알지 못했다. 그는 그녀가 거기에 서 있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듯 엉기적거리며 걸어가버렸다.

 '벌써 내가 이곳에 1년이 넘게 있었다니 믿기지 않아.' 복도 위로 비춘 불빛이 천장을 기어 달려갔다. 그 어떤 감정도 결국 모순이었다. 그리고 그런 모순들은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가에 대한 자기비판으로 이어졌다. 사과나무 아이는 궁금했다. 어디까지의 고통이 자신의 책임이고 어디서부터의 고통이 자신의 책임과는 무관한, 위로받을 가치가 있는 고통일지 말이다.

 어둠이 사람을 잡아먹고 사람은 손가락에 묻은 부스러기 마냥 묻어있는 어둠을 핥아먹는데 그 둘의 사이 어딘가에 서 있는 이 세 사람은 갈 곳 없이 떠돌았다.


유리 소녀

 그녀는 전문적인 인간 혐오자이다. 전문적이라는 뜻은 그녀는 일정 시간, 평등하게 모든 인간들에게 피로와 혐오를 느끼기 때문이다. 그녀는 유리 속에 들어가고 싶었다.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진 않았지만 누군가가 자신의 세계를 건드리지 말았으면 했다.

 하루는 전화하는 소리를 들었다. 자신의 삶에 대해 한껏 자랑하는 내용이었다. 전화를 넘나들며 웃음소리와 높다랗게 흘리는 콧소리와 그러면서도 굉장히 신빙성 있게 단단한 목소리가 자랑의 내용을 가득가득  담아 터질 것만 같았다. 흐르는 고기의 기름위에 비추는 혐오감 같은 것을 느꼈다. 그녀는 누군가가 그녀에게 지시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 협박조와 명령의 목소리가 철없이 우기는 아이의 잔혹한 손과 같았다. 포동포동하고 하얗게 우겨대며 곤충의 날개를 뜯어내고 잔뜩 우거지상을 쓰는 그 고집 말이다.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간섭하지도 않고 신경 쓰지도 않고 알아서들 산다면 좋을 텐데.' 그녀는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그녀는 이해받길 원했다. 자신이 얼마나 부서져 있는지. 누군가 벼랑을 움켜쥐어 피가 나 있는 그녀의 손가락을 봐주었으면 했다. 그녀도 속으로는 인간의 모든 혐오스러운 요소들을 담고 있었다. 약자들에게 보이려는 자랑의 욕구. 그러나 그녀는 알았다. 부질없다는 것을. 어리석다는 것을.

 그녀는 문득 사람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인간의 눈이 얼마나 둥근지 새삼 깨닫고 놀라웠다. 그리고 그녀가 똑바로 눈을 바라보자 파도처럼 내리깔며 갈라지는 고갯짓들, 일그러지는 눈동자의 곡선들을 보면서 과거의 추억들이 새록새록했다. 그녀는 모두가 자신을 외면했던 날들에 오히려 자신의 존재가 인정받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미움과 찔러대는 언행과 따갑게 쏘아보는 눈초리들이 어떠한 감각들을 만들어내고 반응들을 불러 모아 그녀에게 존재라는 자리를 내어준 것만 같았다. 그녀는 고통스럽게 찔러댈수록 더욱 치열하게 살았다.

 전쟁 PTSD는 전쟁이 끝나고 오히려 평화로운 현재에 부적응하여 전쟁터로 돌아가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그녀는 자신이 이러한 PTSD와 비슷한지 궁금했다. 물론 전쟁과 비교가 안된다고들 말할 테지만 무한은 다 무한이다. 작은 무한도 무한일 수 있는 것처럼 남들에게 작아 보이는 고통도 그녀에겐 지옥일 수 있다. '그제나 지금이나 괴롭다는 건 변하지 않았네.' 그녀는 한숨을 쉬며 손을 호주머니에 걸쳐두었다. 그렇게 고정하지 않으면 휘청거리듯 펄럭거리다가 떨어져 버릴 것 같았다.

 '오늘 밤 내가 죽을 수도 있어.' 그녀는 과거에 한 일주일 정도 자신이 조만간 죽을 것이라는 확실한 예감이 든 적이 있다. 어쩌면 소망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그 뒤로 1년이 살짝 넘게 살고 있었다. 죽는다는 것에 대해 그녀는 언제나 확신을 하지도 자신의 질문에 확답을 하지도 못했다. 하루는 높다란 대리석 벽 위를 걸으면서 한쪽 발을 공중에 놓아보기도 했다. 슬리퍼가 그녀의 엄지발가락에 매달려 한가롭다는 듯 천천히 까딱거렸다. 바람이 발바닥과 슬리퍼 사이에 맴돌았고 그녀는 무릎이 불안할 때까지 그렇게 가만히 서 있었다. 그리고 다시 안전한 땅 위로 섰다. 그녀는 두려웠다. 만약 갑자기 커다란 나방이라도 날아오는 바람에 놀라서 실수로 떨어질 까 봐, 갑자기 잘못 발을 디뎌 떨어질까 봐. 그녀는 용기가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의미를 살고자 하는 마음이 남아 있음이라 느꼈다. 이 세상에서 그녀의 유리 같은 껍데기 속의 자아를 만나본 사람은 한 명 빼곤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지구 위의 모든 인간들은 그녀를 알지 못하고 그녀를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녀는 살아있는 유령이었다. 유리로 지어져 밀칠 수도 밟을 수도 있지만 절대로 인지할 수 없는 그런 유령.

 누군가가 물었다. '너는 네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해?' 소녀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렇게 길게 내쉰 한숨의 잔바람이 가실 즈음 그녀가 답했다.

 "유리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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