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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1. 프롤로그

위기의 아카이브

by 아키비스트J

프롤로그: 위기의 아카이브


2025년 어느 날, 저의 11년 분량의 아카이브 이력을 정리하며 한 가지 질문에 사로잡혔습니다. '아카이브는 정말 살아남을 수 있을까?'


1978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허버트 사이먼은 '정보가 풍부한 세상에서 부족한 것은 정보가 아니라 관심'이라고 했습니다. 그의 말이 옳다면, 우리가 그토록 공들여 보존한 기록들은 과연 누군가의 관심을 받고 있을까요? 접근되지 않는 기록, 발견 가능성(Discoverability)이 낮은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디지털 아카이브의 역설입니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많은 것을 저장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많은 것을 잊어가고 있기도 합니다.


저는 역사학을 전공하고 기록학 석사를 마쳤습니다. IT 기록관리 현장에서 8년을 보냈고, 콘텐츠 개발부터 신사업 R&D, 스타트업 초기 운영까지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반년 간 AI를 공부하며 새로운 사업 모델을 탐색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깨달은 건, 아카이브의 위기는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패러다임의 문제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전자기록관리'라는 스큐어모피즘(Skeuomorphism)에 갇혀 있습니다. 종이 서류철을 스캔하듯 과거의 방식을 디지털 화면에 옮겨놓고, 그것을 디지털 전환이라 여깁니다. 공급자의 시각으로 기록을 '관리의 대상'으로만 바라봅니다. 하지만 이미 변화는 시작됐습니다. 사람들은 매일 기록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디지털 도구와 소프트웨어에 말이죠. 기록은 더 이상 제도의 영역만이 아닙니다.


그리고 AI가 등장했습니다.

AI는 우리가 할 수 없었던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도구라는, 어쩌면 조금은 성급한, 또는 낙관적인 결론에 다다랐습니다. 인간이 판단하고, 아카이브가 맥락을 제공하고, AI가 패턴을 찾아냅니다. 세 개의 뇌가 협력하는 구조를 이해했습니다. 저는 이것이 아카이브의 미래라고 믿게 됐습니다.


이 시리즈는 위기에 처한 아카이브가 어떻게 진화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국가적 레거시 메모리얼에서 개인적 마이크로 메모리얼로, 객관성의 신화에서 감정의 윤리로, 관리의 대상에서 협력의 플랫폼으로. 아카이브가 생존하려면 변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변화의 중심에 AI가 있습니다.


그러나 AI는 감정을 대체하지 않습니다. 다만 감정을 비춥니다. 기록이 담고 있는 인간의 흔적을, 그 불완전한 기억의 조각들을 더 선명하게 드러내줄 뿐입니다. 중요한 건 기술이 아니라 우리가 그 기술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입니다.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사이, 그 선택은 지금 우리 손에 달려 있습니다.


기록의 개념은 무엇일까요? 학문적 관점에서 기록은 활동의 증거입니다. 그러나 보편적 시각에서 기록의 의미는 다릅니다. 우리가 잠을 자고 밥을 먹듯 자연스레 기록을 하면서, 과연 조직적, 사회적, 문화적 관점에서의 중요성만이 기록의 존재가치를 평가하는 데 적합한 것일까요? 일상 속에서 매일 기록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기록은 '행위'이자 '행위의 결과물'이며, 나의 공적, 사적 삶의 단편 속에서 우연히 발생하거나 또는 목적을 갖고 만들어 낸 읽어낼 수 있는 정보입니다.


이 책이 아카이브 현장에서 고민하는 동료들에게, 그리고 자신의 기억을 더 잘 관리하고 싶은 모든 이들에게 작은 영감이 되길 바랍니다. 우리는 모두 매일 기록합니다. 그 기록들이 잊히지 않고, 서로를 비추고, 함께 진화할 수 있다면. 그것이 제가 꿈꾸는 아카이브의 미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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