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문득 깨달았습니다. 나는 매일 무언가를 저장하고 있었습니다.
인스타그램에서 본 좋은 글귀는 저장 버튼을 누르고, 유튜브에서 나중에 볼 영상은 재생목록에 담습니다. 트위터에서 발견한 인사이트는 북마크하고, 카카오톡으로 받은 링크는 '나중에 읽어야지' 하며 킵합니다. 노션에 메모하고, 옵시디언에 정리하고, 구글 드라이브에 백업하고, 아이클라우드에 사진을 올립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분명히 어딘가에 저장해뒀는데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거 어디서 봤더라?' 하는 순간이 하루에도 몇 번씩 찾아옵니다. 저장은 했는데 어디에 했는지 모릅니다. 기억은 나는데 기록을 못 찾습니다.
저는 기록학을 연구하는 사람입니다. 기록을 어떻게 남기고, 어떻게 보존하고,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것이 제 일입니다. 그런 제가 정작 자신의 기록 앞에서 무력해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플랫폼은 너무 많았습니다. 구글 드라이브, 아이클라우드, 노션, 옵시디언, 메모장, 사진 보관함, 인스타그램, 메신저. 자료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고, 어디에 뭘 저장했는지 파악하는 것조차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더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자료는 쌓이는데 패턴도, 공통점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분명 비슷한 주제로 여러 번 검색하고 저장했을 텐데, 그것들이 서로 연결되지 않았습니다. 각각의 플랫폼에 고립된 채로 잠들어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디지털 호딩(Digital Hoarding)'이었습니다. 쌓기만 하고 이용은 못하는 상태. 충격적이게도 저는 디지털 호더였습니다.
사실 저는 이미 나름의 시스템을 갖고 있었습니다.
노션을 3년간 사용하면서 개인 아카이브 시스템을 구축했습니다. 링크와 데이터베이스 상호참조 구조로 설계했고, 템플릿을 만들어 수익화까지 해봤습니다. 제가 만든 시스템을 다른 사람들이 돈을 주고 산다는 건 어느 정도는 쓸 만하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런데 한계가 있었습니다. 결국 그건 '아주 복잡한 노트' 수준이었습니다.
옵시디언을 알게 되면서 마크다운의 유용함을 발견했습니다. 그제서야 제텔카스텐(Zettelkasten)이나 세컨드 브레인(Second Brain) 같은 방법론도 접하게 됐습니다. 꾸준히 기록하긴 했습니다. 바빠서 밀린 건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다른 데 있었습니다.
정리는 했지만 대충대충이었습니다. 템플릿을 만들어도 일관성이 없었습니다. 매번 조금씩 다른 방식으로 저장하다 보니 나중에 찾으려면 결국 내 기억에 의존해야 했습니다.
그때 질문을 바꿔봤습니다.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가 아니라 '왜 정리해도 안 찾아지는가?'
'어떤 도구를 쓸 것인가?'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건 정확히 무엇인가?
나는 정리된 자료를 원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나를 기억하는 시스템을 원했습니다. 내가 무엇에 관심을 가졌는지, 어떤 생각의 흐름을 거쳤는지, 어떤 맥락에서 그 자료를 저장했는지를 알아주는 시스템. 검색어를 정확히 넣지 않아도, 맥락만으로 '아, 그때 그거 말하는 거구나' 하고 알아듣는 시스템.
그건 단순한 저장소가 아니었습니다. 일종의 '시맨틱 아카이브(Semantic Archive)'였습니다.
이 연재는 매뉴얼이 아닙니다.
'이렇게 하면 됩니다'라고 알려주는 글이 아닙니다. 한 명의 아키비스트가 자신의 디지털 호딩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실험하고, 실패하고, 다시 시도한 기록입니다. 옵시디언과 클로드 코드(Claude Code)와 RAG를 조합해 '나를 기억하는 시스템'을 만들어가는 여정입니다.
HOW가 아닌 WHY를 담았습니다.
왜 기존 방법이 안 통했는지, 왜 이런 구조가 필요한지, 왜 AI가 이 맥락에서 의미 있는지. 도구 사용법보다 설계자의 사고방식 변화에 집중했습니다. 따라 하기보다 이해하기를 원하는 분들을 위한 글입니다.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갑니다.
내 기억은 어디에 있을까요?
뇌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스마트폰 사진첩에도, 클라우드 어딘가에도, SNS 알고리즘 속에도 흩어져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나의 것'이면서도 '내가 접근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는 점입니다.
이 연재는 그 흩어진 기억들을 다시 불러오는(Re:call) 시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