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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자룡 Aug 01. 2022

13. 오늘 뜬금없이 이사님이 생각났다.

자리를 일어서시면서 "고생 많다." 이 한마디였다.


"쫙~쫙~쫙~쫙~" "휘~익~" 내가 제대로 된 의성어를 쓰고 있는진 모르겠다. 이 소리는 내가 대리 시절, 아주 멀고도 먼 옛날에 당시 이사님의 사무실에서 났던 소리이다.


먼저 밑밥을 뿌려 둔다면, 이 이사님은 내가 존경했고, 그분 역시 나를 좋게 봐주셨던 분이다. 당시의 상황에서 나는 이사님의 사무실에서 거의 나의 몸 둘 바를 몰랐었다.


당시는 세계적인 철강 경기가 그렇게 좋질 않아서 수출부서에 있었던 우리는 매일을 시장분석 보고서에 매달려 있을 때였다. 워낙 불황이라 주문은 안 들어오고, 재고는 쌓여가고, 내가 속해 있던 부서는 시장조사 및 분석, 수출마케팅 전략을 세우는 부서라서 하루하루를 보고서에 묻혀 살았다. 다른 수출 판매 부서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해외 출장을 나가고, 출장을 다녀오면 부서장의 첫 질문이 "주문 몇 톤 받아왔어?" 였던 시절이었다.


우리 부서에서는 당시의 수출재 재고 상황 및 이를 고객사에 얼마를 매치시킬 수 있고, 얼마를 생산해야 하는지에 대한 숫자를 가지고 씨름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창사이래 "감산"이라는 용어는 거의 금기시되어있던 시절에 우리는 "감산"이라는 용어를 보고서에 넣을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사달이 났다. 더군다나 이 용어가 수출 판매 부서에서 먼저 나온다는 건 지금 생각해도 상상할 수도 없었던 일이었다.


"감산"이라는 용어가 들어간 보고서를 보신 이사님이 다른 내용은 보시지도 않고, 6장 정도로 기억된다., 6장짜리 보고서를 쫙쫙 찢어서 사무실에 던져 버리셨다. 당시 젊은 혈기(?)에 다른 분이 그렇게 하셨다고 하면 나는 겉으로야 안 그런 척 하지만 속으로는 "이런 *자식, 말로 해 이 **야."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분이 그렇게 하시는데야 그렇게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오죽하면 저분이 저러실까."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보고를 같이 들어갔던 과장님과 나는 쪼그려 앉아서 조각난 종이들을 하나하나 집어 들고서, 이사님의 사무실을 나왔다. 다시는 내가 작성한 보고서에 "감산"은 없다.


당일 보고서를 마무리하고, 다들 퇴근 무렵이 되어 과장님이 팀원들에게 저녁 먹고 가자고 하셔서 책상 정리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이사님이 가방을 들고 퇴근을 하시면서 "야, 구대리, 소주 한 잔 하자."하시는 것이었다. 이사님과 대리가 둘이서 저녁을 한다는 게 대리 입장에서야 그리 좋은 일은 아니다. 어렵기도 하고, 팀원들 눈치도 보이고 하니 그리 반길 일은 아닌데, 당시엔 하늘 같은 이사님이 한 잔 하자 하시는데야 거절할 수도 없고, 당시의 회사 문화에서 거절은 곧 직장생활 안 하겠다는 것과 동일 시 되는 그런 분위기였다.


팀원들의 눈길을 뒤로하고 나는 이사님을 따라나섰다. 당시 이사님의 술자리는 각 일병+1병이었다. 예를 들면, 2명이면 소주 3병, 4명이면 5병 이런 식이었다. 주변 식당에서 둘이 앉아서 소주를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길 하셨다. 주로 옛날이야길 하셨었다.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는 거의 기억에도 없다. 하도 오래전 이야기라서 말이다. 그런데 기억나는 건, 당일 이사님 사무실에서 있었던 이야기는 단 한마디도 없으셨다. 왜 그랬는지, 그런 일을 당한 나와 과장님은 괜찮은지 등등에 대한 단 한마디의 언급도 없으셨다.


그리고, 자리를 일어서시면서 "고생 많다." 이 한마디였다. 그리고 나는 그 말씀이 의미하는 바를 충분히 받아들였다. 다들 어려운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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