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사마을_변유경
2023년 10월 3일 화요일 오전 10시
노원역 1번 출구에서 1142번 버스를 타고 백사마을로 향한다. 오늘도 구름이 끼었다. 지난번에도 그랬고 매번 철거지역 답사를 하는 날은 구름이 끼었다. 햇빛이 강하지 않아 야외활동을 하기에 좋다고 생각한다. 지도를 보니 상계역, 중계역, 하계역이 있다. 계는 뭐 길래 상중하로 나눠 놓았을까. 어렸을 때, 그러니까 국민학생 때 읽었던 책 중에 상계동 아이들인가 하는 소설책이 있었다. 읽고 독후감을 써야 했던 소설이었던 것 같은데, 무슨 내용이었지, 그것도 이 근처 달동네 사는 아이들의 이야기였던가. 소설책으로만 알던 상계동에 이제껏 와 볼 기회가 없었다. 그러니까 오늘 생전 처음으로 상계동 근처에 와본다. 버스 밖으로 보이는 이 동네 풍경에는 아파트가 많다. 버스에서 내려 만나기로 한 지점으로 걸어간다. 아마도 내가 가장 먼저 왔나 보다. 오늘 답사를 같이 하기로 한 일행 두 명을 기다린다. 근처에 있는 제로웨이스트 물품을 파는 카페를 구경한다. 아직 문을 안 열었다. 곧 일행이 도착한다. 이제 우리는 함께 백사마을로 올라간다. 마을 입구에 가장 먼저 보인 건 부잣집 막내아들에서 송중기 엄마가 하는 음식점으로 나왔다는 삼거리 식당, 드라마 장면을 캡처한 현수막이 음식점 입구에 걸려있다. 그 뒤로 천천히 오르막길을 걷는다. 여기엔 무너진 벽을 슬레이트판으로 막아 놓은 집들이 있고, 창문의 유리대신 은박 돗자리 혹은 나무 판때기를 대어 놓은 집들이 있다. 그리고 곳곳마다 연탄을 나눠준다는 팻말이 달린 장소들.
이 동네는 차가 들어갈 수 있을 만큼 길이 넓다. 집 벽에는 갖가지 공가 안내문이 쓰여 있고, 무너질 수도 있으니 조심하라는 혹은 절대 들어가지 말라는 위험문구도 있다. 이곳은 누구나 올 수 있지만, 또 아무도 들어가서는 안 되는 공간이 혼재하는 곳이다. 하지만 이곳에도 누군가 가꾸는 텃밭이 있고, 배추와 무가 자라고 있다. 자연이 있는 곳이라 귀뚜라미 소리, 딱따구리 소리, 까마귀 소리, 까치 소리가 들린다.
넓은 길 때문일까, 이 동네는 다른 동네보다 지나가는 사람이 많이 보이고 차도 많이 보인다. 내리막길 중간에 어떤 아저씨가 홀로 앉아 크게 음악을 털어놓고 먼 산을 바라본다. 혹시 위험한 사람은 아니겠지. 그리고 내리막길에 보이는 찢어진 츄르봉지, 이곳에도 길냥이를 돌보는 사람들이 있나 보다. 저 멀리 보이는 큰 바위 옆구리를 드러낸 산, 그리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고양이 울음소리, 이건 아기 고양이 소리 같은데, 그래, 확실히 고양이가 있구나. 그리고 길 한편에 놓여 있는 스팸박스, 며칠 전에 비가 왔는데도 상태가 멀쩡한 걸 보니 최근에 누가 가져다 놓은 건가 보다. 그러고 보니 그 옆에 있는 쓰레기봉투들도 꽤 된다. 이곳에 아직 사람들이 많이 사나 보다.
사람들의 통행을 막는 줄이 이곳저곳에 설치되어 있고, 감시티브이가 전봇대 위로 달려있고, 그런데 이곳은 왜 이렇게 모기가 많지, 목 부분이 조금 간지러워 손으로 쓰다듬는데 얼떨결에 벌레 한 마리를 잡아버렸다. 혹시 이게 모기인가, 목에 모기를 물린 것 같이 조금 시큼한 느낌이 오기 시작한다. 그런데 정확히 어디를 물린 건지 모르겠다. 깨끗한 시멘트벽 곳곳에 붙은 붕괴위험 표지판, 공사한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아, 목덜미에 모기를 물린 게 자꾸만 신경 쓰인다, 이런 곳에도 길 구석구석에 배치되어 있는 소화기, 아 자꾸만 손이 모기 물린 곳으로 간다, 이런 곳에도 있는 교회. 교회 앞 길냥이 집에는 사료와 물통이 있다, 아, 이제야 부어오르는 모기 물린데.
어떤 골목에 다다라 무한히 뻗은 계단을 따라 내려가는데, 누군가 길바닥에 쏟은 화투. 그리고 그 근처 집 지붕에 널린 빨래. 시멘트 바닥이 굳기 전에 써 놓은 누군가 누구를 사랑한다는 글귀. 그런데 상대방의 이름은 차마 다 쓰지 못하고 성만 써 놓았다. 길가 사람의 통행을 막는 줄에 걸려있는 누군가의 속옷 혹은 양말들. 그리고 집 앞 화분에서 크고 있는 작물들. 이제 자동차가 종종 지나가고, 누군가 요리하는 냄새가 난다. 그러다 갑자기 생각나는 오늘 어떤 꿈을 꿨더라, 그런 생각을 하는데 바로 옆 건물 벽에 꿈과 관련된 문구가 있는 벽화를 발견한다. 벽화의 기운이 나에게 꿈에 관한 생각을 불러일으켰나 보다.
벽화 말고도 벽에 그려진 건 이삿짐 전화번호가 적힌 프린팅. 동네의 분위기를 바꿔보자고 그린 벽화가 이제는 괴기하게 보인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마주치는 길냥이들. 우리는 거의 한 달마다 한 번씩 만나고 있네, 지난달 그때 나는 어떤 상태였더라. 염불소리가 난다. 그리고 그 뒤로 개 짖는 소리도 들린다. 그리고 지나치는 옛날 미용실 건물. 어떻게 이렇게 좋은 차들이 여기에 주차되어 있을까. 나는 지금 비어 있는 영화 세트장에 온 것 같은 비현실감을 느낀다. 동네에 점점 더 크게 울려 퍼지는 염불소리. 한치의 쉼도 없이 계속되는 이 염불소리는 오디오겠지. 담장에 핀 호박꽃, 나팔꽃, 그리고 금잔화.
이제 우리는 목탁소리에 발맞춰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저 멀리서 들리는 확성기 소리, 뭘 판다는 걸까. 우리가 오자 갑자기 짓기 시작하는 개 두 마리 소리, 적어도 두 마리, 아닌가, 점점 더 많아지는 개 짖는 소리. 이 동네는 길냥이 소리도 우렁차다. 이곳은 속세의 경고음도 들리지 않는 세상과 단절된 곳 같다. 그런 생각을 하는데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이 도시의 그것 같지 않게 청량하다.
셀러리 냄새인지 저쪽에서 밭 냄새가 나는데, 이제 내 앞에 무단 경작 금지 팻말이 있고, 바로 그 뒤에 버젓이 배추밭이 있다. 텃밭에서 어르신들이 일을 하러 나온 건지 트로트 음악소리가 들리고, 바닥에 떨어진 은행에서 조금은 고약한 냄새가 올라온다. 절인 줄 알고 간 곳에는 절은 없고 엉뚱한 강아지 한 마리만 우리를 향해 힘차게 짓는다. 뒷집 아저씨는 검은 옷에 검은 장화를 신었는데 여기 절 없다며 우리를 내몬다. 우리는 이제 동네에서 내려와 시작지점으로 향한다. 땀이 좀 났다가 마르기를 반복한다고 느꼈을 때, 닭소리가 문득 들리고, 또다시 염불소리가 나는 것 같이 귓가에 머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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