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언제나 삶에 미소지었다.
* 이 글은 23년 9월, 강가희 작가님(https://m.blog.naver.com/itsk2h)의 글쓰기 수업을 들으며 제가 처음 썼던 글입니다. 합평을 통해 누군가에게 글을 평가받고 같이 소감을 나누는 일은 꽤나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특히 이젠 괜찮다고 생각해서 덤덤하게 시작했지만 글을 쓰고 다듬으면서 아 나는 아직 괜찮지 않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것 역시 괜찮았습니다. 마음이 때론 아프지만 그게 당연한거구나 하고 말이죠. 평생 그럴 수 밖에 없을 테니까요. 어쨌든 아이의 수술을 겪고 지내는 동안의 이야기를 한편의 글로 썼는데 좀더 자세히 남기고 싶어서 브런치 작가도 된김에 브런치 북에 좀더 자세히 기록했습니다. 날라가버리는 기억을 붙잡아 두는 것도 좋을 듯 싶습니다. 01~09의 글과 다소 중복되는 부분도 있겠지만 처의 첫 글이라 같이 묶어봅니다.
아이가 갑자기 수술대에 오르게 되었다. 만 11세를 갓 넘긴 때였다. 진단명은 특발성 척추측만증. 특별한 원인 없이(아마도 선천적 요인으로 추측되지만) 성장기에 척추가 급격하게 s 또는 c 자 모양으로 휘는 병이다. 치료 방법은 수술 외엔 없으며 아이는 이미 급성장기를 맞이하고 있어서 하루가 다르게 나빠지고 있었다. 슬퍼할 새도 없이 국내에서 가장 유명하다던 교수님을 찾아가 수술 날짜부터 잡았다. 9월에 진단받은 아이가 수술받을 수 있는 가장 이른 날짜는 그다음 해 5월이었다. 아이의 커브 각도는 이미 60도가 넘었다. 40도 이상이면 수술을 해야 하며 60도는 맨눈으로 보기에도 매우 심각하다. 그뿐 아니라 휘어진 뼈가 폐나 심장 등의 장기를 압박해서 몸에 이상이 생기게 된다. 그래도 다행히 병원이 지척에 있어서 자리만 난다면 아무 때나 검사와 수술을 받을 수 있기에, 매일 아침엔 병원에 빈자리가 있느냐는 전화를 걸었다. 절망에 사로잡혀 낭비할 시간조차 없었다. 밤마다 베갯잇을 적시며 울어도 아침엔 전화를 걸어야만 했다. 코로나 19시기라 그런지 천만다행으로 취소된 수술 날짜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진단받은 지 딱 한 달 만의 일이었다.
그때를 떠올리는 건 마치 덜 아문 상처를 마구 헤집는 것과 같다. 아이러니하게도 아이가 진단받기 전의 그때는 정말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도움받는 곳 하나 없이 오직 남편과 둘이서만 전전긍긍하며 키우던 아이도 어느 정도 커서 손이 덜 갔다. 또 오래전부터 원하던 집에 이사하게 돼서 그저 좋기만 했다. 남편과 나는 직장생활을 제법 오래 한 터라 직장에서도 특별할 것 없이 평온한 날이 이어졌다. 같이 한강을 걸으면서 아 이렇게 쭉 살면 되겠네. 웃으며 얘기하던 그런 안온한 저녁의 연속…. 그런데 갑자기 한순간에 바닥으로 곤두박질친 이후엔 꼭 고슴도치를 안고 있는 것만 같은 나날이었다. 우리는 정말 셋 뿐이었는데 안으면 안을수록 더 아팠던 그때. 수술장에 홀로 아이를 들여보낸 후 보았던 병원 앞 정원은 단풍이 한창 물들어 있었다. 눈물로 얼룩진 그 색색의 잎들이 얼마나 가슴에 사무치던지. 비로소 그때 나는 사무치다.라는 말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늘 의지했던, 단단해 보였던 남편이 상한 짐승처럼 북받쳐 울었다. 우리는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무사히 수술을 마치기만을 바라는 것 말고는 달리 생각나는 것도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그 정원 벤치에는 우리처럼 눈물로 온몸을 채운 사람이 많았다. 우리의 울음이 그저 평범해지는 이상한 공간. 아이는 6시간여의 긴 수술 끝에 척추에 스무 개도 넘는 나사를 박았다. 수술 후의 끔찍한 고통은 마약성 진통제에 의존해 오롯이 혼자 이겨내야 했다. 게다가 그 작고 마른 등에는 길고 긴 흉터가 생겼고 장애 등급을 받게 되었다. 만 11세에 장애인 복지카드를 갖게 된 내 딸.
아이가 수술하고 난 후에 나는 가장 좋아했던 프리다 칼로의 그림을 한동안 볼 수가 없었다. 프리다 칼로는 멕시코 출신 여류화가로, 18세 때 사고로 쇠기둥이 몸을 관통하는 큰 부상을 입는다. 척추와 몸의 곳곳에 못을 박았고 수십 차례 큰 수술을 받았으며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아팠다. 자신의 자화상인 <부러진 기둥>은 절망적인 그녀의 몸 상태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우리 아이의 엑스레이도 이런 모양이겠지. 척추를 따라 촘촘하게 박혀있는 나사들…. 아이가 자꾸 생각나서 이 그림은 왠지 계속 피하고만 싶었다. 그토록 좋아했었던 그녀의 그림이었는데. 나를 날카롭게 찌르는 그 그림이, 그녀의 생애가 한동안 참으로 버겁게 느껴졌다. 누군가는 안쓰러워하며 동정하는 대상이 내 아이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결국 그 모든 걸 다 이겨내고 멕시코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가 되었다. 아니 세계에서도 제일 유명한 여성화가 이리라. 그녀의 생애는 아픔과 좌절로 점철되어 있었지만 강인한 생명력으로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구축했다. 이상하게도 그런 점이 또 어떤 면에서는 위로가 된다. 이대로도 괜찮지 않을까? 아이도 어쩌면 이미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지 않을까? 혹은 자신을 온전히 인정하고 절망 속에서만 살지 않았던 프리다가 그랬던 것처럼 내 아이도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
아이는 그 힘든 수술을 받고 놀랍게도 자못 의연했다.
“수술 힘들지 않았어?”
“수술은 힘들었지만, 학교에 가지 않아서 되게 좋았어. 맘대로 놀고 쉴 수 있고.”
“그렇지만 엄마는 너 복지카드 볼 때마다 마음이 좀 그래….”
“그게 왜? 이것만 있으면 지하철도 무료고 롯데월드도 안 기다리고 탈 수 있잖아!”
“애들이 다 아는 거 불편하지 않아?”
“피구 할 때도 엄청나게 보호해 주고 뭐만 하려고 하면 너는 하면 안 돼 해줘서 편할 때도 많아. 선생님이 관심 가져주셔서 그것도 좋고. 그리고 자세히 보면 애들 뭐 하나씩 다 아파. 아토피 있는 애도 있구 교정하는 애도 있고 눈이 엄청 나쁜 애도 있구 심장 수술한 애도 있어. 나도 그런 거지 뭐.”
내가 끊임없이 비관하며 가여워할 때도 아이는 그러지 않았다. 이미 일어난 일이니 어쩔 수 없잖아. 하면서 수술이 꼭 나쁘지만은 않았다던 딸아이. 내 딸의 시련은 적잖이 잔인했지만 아이는 그걸 불평만 하지는 않았다. 아직 작은 딸에게는 친절하지 않은 삶일지라도 그저 묵묵히 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아, 오늘도 나는 아이로부터 배운다. 프랑스 화가 라울 뒤피는 이런 말을 남겼다. “삶은 나에게 항상 미소짓지 않았지만 나는 언제나 삶에 미소지었다.” 라고. 그래서 오늘 나는 라울 뒤피의 말을 빌어 속삭인다. “때로는 삶이 너를 배신하더라도 너는 삶을 배신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네가 너의 인생을 향해 웃어주면 그만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