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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퐁당 Dec 22. 2020

집으로 오는 길

윤석중 시, 이영경 그림 <넉 점 반>을 보고


아기가 아기가 가겟집에 가서

"영감님 영감님 엄마가 시방 몇 시 냐구요."

"넉 점 반이다."

"넉 점 반 넉 점 반."


아이는 넉 점 반을 중얼거리며 가게를 나온다. 시간을 알아오라는 엄마의 심부름으로 구복상회에 온 아이는 주인 할아버지로부터 4시 반이라는 소리를 듣고 집으로 간다. 집으로 가는 길에 아이는 물먹는 닭을 한참 서서 구경하기도 하고 땅바닥 개미의 행렬도 구경한다. 벌레를 물고 가는 잠자리를 따라 큰길까지 가기도 하고 잠자리 덕에 분꽃 밭에 앉아 놀기도 한다. 그렇게 한참을 놀다 해가 꼴딱 져서야 돌아온 아이는 엄마에게 지금 4시 반이라고 시간을 알려준다. 동생 젖을 물리던 엄마는 아이를 쳐다본다. 마루엔 금방 올 줄 알았던 아이를 위한 저녁밥 한 공기가 있다. 언니, 오빠들은 벌써 방 안에서 밥을 먹고 있다.


이야기의 묘미


이야기는 1940년에 윤석중님이 쓰신 동시라고 한다. 이영경작가의 푸근한 그림도 좋았고 짧은 동시를 이렇게 이야기로 엮어내는 것이 너무나 재밌다. 이야기는 처음부터 다 알려주지 않는다. 아이의 집 바로 옆 개울만 건너면 구복상회가 있다는 것은 끝까지 다 봐야 알게 되고 그제야 지도가 그려진다. 동시 혼자서도 훌륭하고 그림도 너무 좋지만, 마지막 페이지까지 넘겨봐야 이 그림책의 묘미를 알 수 있다. 어쩜 이렇게 시치미를 떼고 나중에 보여줄 수 있을까? 어쩌면 이렇게 아이가 가는 길을 나도 따라가게 만들어 준 것일까? 아이를 따라가며 보는 풍경엔 우리가 많이 봤던 어린 시절의 풍경도 남아 있고, 엄마가 된 지금 내 아이의 걸음을 따라가며 보게 되는 풍경도 있다. 그 길엔 닭과 개미, 잠자리와 두꺼비, 분꽃과 강아지도 있고 우리 세대 이전의 풍경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림 속으로 들어가면

한 페이지만 봐도 이젠 시골서도 잘 볼 수 없는 방 안 풍경이 보인다. 커다란 날짜 달력과 액자들, 구식 라디오와 성냥갑, 옛날 쟁반과 미닫이 창호문, 다이얼 전화기와 남양 분유통과 그때도 있었을 바카스 상자, 오래된 앉은뱅이책상과 벽지까지. 지금도 먹는 박하사탕 모양은 그때도 그 모양이었다. 이제는 사라진 빨간 손잡이의 푸른 비닐 우산도 있다. 가게 안은 그 시절의 물건들이 모두 모여 있는 박물관 같다. 복덕방을 겸하는 구복상회의 인자하신 할아버지는 지금은 어디에 계실까?

담장에 붙여진 연탄 광고나 지금은 볼 수 없는 초가지붕도 풍경을 살펴보면 나온다. 그 시절도 데이트를 하는 커플이 있었고 그들을 쳐다보며 지나가는 자전거 탄 고등학생들도 있다. 아이가 돌아온 집 앞 가로등엔 불이 켜져 있다. 해가 다 져서 도착한 것이다. 구복상회 할아버지도 밖에 나와 쉬고 계시고 닭도 이젠 닭장에 들어갔다. 아이도 집에 왔고 강아지가 반긴다. 대문 밖에 노을이 보인다. 방의 환한 빛과 마당의 어둑어둑한 호박잎이 빛과 어둠으로 대조되며 시간이 훅 지났음을 일깨워 준다. 어린 시절 밖에서 한참 놀다 어둑해졌을 때야 비로소 집에 갈 생각을 했던 게 떠오른다. 돌아다니느라 손도 꼬질 해졌을 아이는 배고픔도 집에 와서야 알아차렸을 것이다. 분꽃 몇 송이를 마루 위에 올려놓는 아이를 보는 엄마의 눈동자엔 많은 물음들이 묻어 있지만, 어여 밥 먹어. 한 마디로 아이를 어르는 듯하다. 그래, 얼른 밥 먹자 아이야.


연기 잘하는 배우들

아이의 시선이 가는 곳에 나의 시선도 간다. 아이가 바라보는 하늘을 나도 본다. 아이가 보는 잠자리와 할아버지를 나도 보고, 할아버지가 보는 라디오와 시계를 우리도 본다. 아이가 보는 닭과 물을 우리도 본다. 아이처럼 개미와 분꽃을 보다 보면 우리도 앉아서 '니나니 나니나' 하게 된다. 자전거를 타고 지나는 고등학생이 보는 커플을 우리도 따라 보게 되고 해가 져서야 대문 앞에 다다른 아이를 보는 할아버지 시선에 눈길이 머문다. 엄마는 어딜 다녀왔는지 안 봐도 알겠다는 눈으로 아이를 쳐다본다. 그런 동생을 방에선 큰언니가 보고 있고, 에필로그에선 큰언니가 수놓는 것을 아이가 함께 들여다본다. 그런 그들을 우리도 들여다본다. 이렇게 등장인물의 시선이 머무는 곳을 따라가며 이야기는 연결된다. 짧게 끝날 수 있는 이야기를 멀리 둘러가게 한 이것이 한 편의 공연이라고 한다면, 모두가 몰입을 잘하는 배우들이라 그들이 바라보는 곳은 우리도 쳐다보게 된다. 책을 다 본 뒤 앞표지를 다시 보니, 아이는 이미 옆에서 공연을 시작했고 강아지만 공연에서 잠깐 나와 정면으로 우릴 보며 이제 시작이라고 알려 주는 것 같다.


집으로 오는 길


몇 개월 후면 우리 아이도 학교에 간다. 셔틀도 없는 이 시골에서 자차로 대부분을 통학하며 여태 아이 혼자 집으로 온 적이 없었다. 집과 거리가 있어 학교를 가도 얼마간은 동행하겠지만, 언젠가 혼자의 걸음으로 나갔다 들어오는 그 길목에서 아이는 무슨 생각을 할까? 커가면서 혼자 있는 시간도 많아질 테고, 개미나 꽃과 잠자리 말고도 내가 모르는 일이 생겨날 것이다. 그때 집으로 돌아오는 아이를 나는 어떻게 볼까? 이 책에 나오는 아이 엄마의 시선은 정확히 아이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밥도 옆에 있으니 아직까진 "그래. 어서 밥 먹자."로 읽힌다. 하지만 혹시라도 소식도 없이 늦게 들어온다면, 그땐 아이를 믿는다는 마음만으로는 부족할 것 같다. 혹시라도 아이에게 나쁜 일이 있을까 봐 대비하는 마음으로 합리적인 의심도 할 수 있지 않나 싶다. 이런 생각까지 하다 보니 이 책에 나온 아이 엄마의 시선과 표정이 예사로 보이지 않는다. 마냥 웃는 표정이 아니고 갸우뚱 한 표정이라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아이와 함께 땅바닥을 구경하고 노는 것도 이젠 얼마 남지 않았으니 함께 '니나니 나니나' 할 수 있는 시간만큼 아이가 바라보는 것을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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