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은 다시 떠오른다」ㅣ 어니스트 헤밍웨이 ㅣ 민음사
백화점은 고민한다. 욕망의 전차를 타고 공간을 전이할 지금의 신인류와 그들의 결핍을. 1인가구와 딩크, 반려인과 비건, GenZ와 알파. 이것은 과연 우리 시대의 부재를 알리는 온당한 이름일까. 지불한 만큼 얻는다는 믿음을 선사할, 구매 가능한 결여는 대체 무엇일까. 4년간의 전쟁 속에서 살아남은 1920년 무렵의 젊음은 쾌락과 환멸에 취했다. 카페와 바, 호텔과 클럽을 오가는 일상 속에 견딜 수 없는 염증이 엄습할 때면 그들은 미련 없이 떠났다. 국가와 도시를, 부인과 애인을, 우정과 진실을. 그들의 이름은 '길 잃은 세대'였다. 끊임없이 길 위에 섰지만, 결코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지 못했던 그 길을 찾아 내달리는 청춘들이 여기에 있다.
파티와 연애와 지폐가 넘치는 파리엔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 드물다. 거리의 여인은 약혼녀가 되고, 백작의 칭호는 어딘지 의심스러우며, 5시에 보기로 한 이는 6시 15분까지 나타나지 않는다. 오직 유희가 도덕인 이곳에서 작가를 꿈꾸던 콘은 삶의 균열을 느낀다. 이루지 못한 사랑의 절망과 탐닉을 반복하는 제이크는 보류된 욕망에 길들여져 버렸다. 약혼자가 있지만 자기와 추종자 여럿도 있는 브렛은 '모든 게 끝난 듯 비참한 기분'이다. 키스를 바라지만 연적도 인정하는 제이크가 아닌, 슬픔과 좌절에 휩싸인 자신을 철저히 직면하려는 콘에 이끌린 브렛은 프랑스와 스페인의 접경, 산세바스티안으로 갔다.
자기 기만의 탈퇴를 외친 동지였지만 사랑은 아니었으므로, 그녀는 콘을 버리고 다시 파리로 복귀한다. 그런데 제이크는 부르게테의 낚시와 팜플로나의 투우로, 또 다른 유희를 찾아간다. 오히려 브렛이 약혼자와 추종자를 대동한 채 그를 좇는다. 그 누구도 독점할 수 없기에 연대했던 이들과의 우정 속에서 그 자신의 말 그대로 '꽤 오랫동안 사랑하다 말다'하던 제이크는 어느 밤,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고 얻으려고만 했던 자신을 깨닫는다. 큰 위험에 빠질 것을 알면서도 황소의 영역으로 돌진하고 마는 진실한 투우사에게 감동했으나, 스스로는 투우사의 영역을 한치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날아드는 계산서를 책과 술로 막아내던 그를 떨치고 브렛은 용맹하고 젊은 투우사, 로메로와 떠난다. 비록 순간일지라도 바로 지금 가장 뜨거운 가슴에 기꺼이 굴복하는 이를 그리며, 열정이 거세된 시대와 세대로부터 벗어나길 갈망한 그녀였으므로.
두 번의 도피로 마침내 브렛 원정대는 해산한다. 비로소 홀로 있게 된 제이크는 '도무지 예상할 수 없는 스페인'으로 다시 향한다. 시대의 불가항력으로 길을 잃어버렸다는 허무를 넘어, 더 이상 타인을 흉내 내지 않는 삶을 위해 마땅히 길을 잃어보겠다는 도전이었을까. 산세바스티안에서 수영을 하던 그에게 '마드리드에서 곤경에 빠져있는' 브렛의 전보가 도착한다. 일말의 예상은 있었지만 망설임은 없던 그는 이렇게 회신한다. '내일 급행으로 도착. 사랑하는 제이크'. 어쩌면 행복했을 지난날을 회고하는 그들은 어느 오솔길을 찾은 걸까, 여전히 잃어버릴 수 있는 많은 길이 남아 있음에 안도하는 것일까.
며칠 전, 거나하게 취한 아버지의 전화엔 조용히 하라는 웅성거림이 함께 들렸다. 음소거된 지하철이 당연하고, 댓글과 리뷰로 타인을 심판하는 요즘의 우리는 어쩌면 관용이란 여유를 잃어가고 있는 건 아닐지. 노동소득의 가치가 절하되고 자본소득의 믿음이 곤고해져 가는 세대의 이름은 어떻게 불러야 좋을까. 서울 빌딩숲의 가까운 거리에 웅크리고 구걸하는 노인들이 늘어가는 건 언제까지 외면할 수 있을까. 감히 살 수도, 팔 수도 없는 이 시대의 결핍들을 떠올리며 어떤 것을 포기하고 어떤 것을 붙들어야 할지 헤아려보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