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비 클레어 Nov 25. 2024

아직은 낯선 6월의 제주

2024.6.6 ~ 6.9 


 한강 작가의 <작별하지 않는다> 소설을 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6월의 휴일에 제주를 찾았다. 상업적 이미지에 가려져 잘 알지 못했던 제주의 한을 담담하지만 강렬하게 그려낸 풍경은 마냥 가닿고 싶은 휴양지가 아니었다. 무지를 속죄받고 싶은 마음으로 이번 방문에서는 익숙한 관광지보다 제주의 새로운 면모들을 발견하는데 시간을 보내고자 했다. 사실 제주는 내게 '애착'의 대상이 되기엔 여전히 낯선 곳이었다. 학교에서 단체로 처음 찾은 후, 가족들과, 친구들과 들렀던 추억이 있지만 자연 그 자체의 경이로움을 주는 관광지 중심으로 다녔기에 내가 아는 제주는 외국인과 다를 바 없는 수준이 아닐까 싶었다. 제주에 인기가 급상승했던 코로나 특수 시기(제주도 입도 관광객 2000년 500만 명에서 2021년 1200만 명 돌파), 베트남에 머물렀기 때문이었을까. 또 다른 누군가의 발자취를 답습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귤밭에 둘러싸인 감성적인 스테이, 우도에만 있는 간식들, 작지만 개성적인 독립서점들 같은 경험이 탐나기도 했다. 결국 그런 것들과 비슷하기도 하고, 다르기도 했던 나름의 시간을 정리해 보았다. 한 발자국 더 제주의 심장에 가까워지길 기대하며. 


[ 제주에 꽃 피운 숭고함 ] 

 이번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은 공간은 '성 이시돌' 목장과 동산 일대였다. 어쩌면 도심 속 내 일상에서 가장 멀어져 있는 생동하는 자연과 묵상의 공동체가 발하는 아득함에 반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귀여운 이름의 아이스크림 카페 '우유부단'에서 마주한 탁 트인 벌판의 정경을 시작으로, 처음 보는 형태의 생경한 '테시폰식 주택'이 나타났다. 테시폰은 '이라크 고대도시 유적인 크테시폰의 아치 구조물을 참고해 창안한 건축물'이다. 나무로 아치 모양 틀을 세우고 시멘트 모르타르를 덧발라 골격을 만든 뒤 내부에 블록으로 벽을 쌓아 만든 이 독특한 집은 한국의 1960년대에 지어졌으며, 현재는 국내에 오직 제주에만 20여 채 남았다고 한다. 그 옆엔 푸른 초원을 누비는 말들이 울타리 너머로 보였다. 이 모든 정경을 아우르는 이시돌 목장은 1954년 부임한 아일랜드 성골롬반외방선교회 선교사 맥그린치(한국명 임피제) 신부가 조성한 곳으로, 명칭은 스페인 천주교 성인인 ‘이시도르’에서 유래했다. 그중에서도 백미는 성경의 인물들과 사건을 조형물로 형상화한 새미은총의 동산이었다. 정성스럽게 다듬어진 수목이 안내하는 호젓한 길을 걸으며 중앙의 호수에 담긴 동산과 높다란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부족한 종교심에도 이 성스러운 공간에 잠시 머무는 것 자체가 일상의 번민에 쉽게 압도되는 나를 벗어놓고 다시 시작하는 새로운 나로 갈아입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이 공간을 기억하게 만든 것은, 목장에서 직접 만든 '우유잼'이었다. 신선한 우유와 치즈도 일품이었지만, 시원하게 냉장된 농도 짙은 잼을 빵에 발라먹으며 이시돌을 그리워했다.  

 

'물 위에 떠있는 교회'로 유명한 이타미 준 설계의 '방주교회'도 들렸다. 디자인 모티브가 되었을 성서의 유명한 홍수 이야기를 새삼스레 떠올리며 예상보다 아담하고 고요한 (예배가 없는 토요일에 들렸다) 예배당 한편에 앉아 찬찬히 집 모양의 나무 프레임 사이로 보이는 창 밖의 풍경과 소실점 같은 위치의 조그마한 창문, 중앙의 십자가를 들여다보았다. 이런 곳이 일상이 된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쉽게 이어지지 않는 상상을 접어두고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나와 달리 제주가 제2의 고향 같다는 동행이 안내한 곳은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 미술관'이었다. 폐교였던 삼달분교를 개조하여 2002년 문을 연 이곳에 붙은 '두모악'은 한라산의 옛 이름이라고 한다. 개관 후 3년이 지난 2005년, 생의 마지막을 불사르며 유작처럼 이곳을 세웠던 김영갑 작가는 별세했다. 1999년부터 몸이 아파왔고 2001년이 되어서야 루게릭병을 진단받았다 짧게 고 하니, 더 이상의 삶이 불투명해진 그 시점에 그는 이곳을 세울 결심을 했고 꼬박 1년 만에 그 꿈을 이뤘던 것이다. 1980년대부터 사진 작업을 위해 찾았던 제주와 운명 같은 사랑에 빠진 그는 가난과 고독, 거친 바람에도 꿋꿋이 예술혼을 지켜냈다. 생계를 위협받는 상황에서도 누군가의 인정보다, 자기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정직함으로 한 장 한 장을 남겼다. 조금 떨어진 거리에 나란히 선 두 나무가 보이는 완만한 오름은 그가 특히 사랑한 풍경 같았다. 같은 장소의 사계절을 담았는데 나는 어스름을 밝히며 등장하려는 구름 속의 햇살을, 그는 안개가 자욱이 내린 어느 날의 모습을 하나씩 골라 액자에 담았다. 이곳을 다녔을 아이들도 이제 모두 어디에 있을까. 학교를 둘러싼 작은 정원은 정감 있는 토우들과 사진을 맨 돌하르방이 정령처럼 작가를 수호하는 듯했다. 


[ 기억하고 싶은 동네, 구좌읍 송당리 ] 

 애월과 서귀포를 오가며 제주가 정말 크다는 걸 다시 한번 실감했다. 이번에 처음 들린 구좌읍 송당리는 현재 한국에서 제일 크다는 스타벅스 (전체는 약 1,300개가 있다고 한다)를 보려는 목적이 컸다. 도착해 보니 이미 중국 관광객들에게도 소문난 것인지 대형 관광버스들이 보였고 주차장도 아주 널찍했다. 몇 년 전, 상하이의 리저브 로스터리에서 천장 위의 튜브 속을 달리는 원두들의 운동에 경탄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복층으로 구성된 이곳엔 원두들의 향연은 아니었지만 거대한 키네틱 아트 조형물이 천장에 매달려 압도적인 이미지를 형성했다. 그러나 하이라이트는 2층의 창가에서 보이는 인어공주가 있는 연못과 폭포, 정원의 풍경이었다. 이곳의 키 테넌트는 스타벅스였지만 여기까지 온 관광객들이 두루 즐길 수 있는 휴식공간과 조경, 지브리 도토리 숲과 마녀배달부 키키 카페, 또 다른 이시돌 매장과 색다른 콘셉트의 파리바케트까지 다양한 테넌트들이 모인 복합문화공간이었던 것이다 ('송당 동화마을'로 바이럴 되고 있다). 특히 파리바게트에서 이곳의 로컬리티를 살려 구좌 당근으로 만든 주스, 흑돼지 소시지 핫도그와 말 캐릭터 '몽생이'의 일러스트를 컬러링 한 어린이 고객들을 작품을 붙여 놓은 것도 '동화마을'이란 콘셉트에 잘 어울렸다. 심지어 주스와 핫도그에 감동하여 저녁에 만나기로 한 제주도민 지인들께도 조금 나누었는데, 구좌 당근이 유명한 건 그 정도로 논밭이 척박함을 나타내는 척도이기도 하다는 말씀에 약간 민망한 생각이 들었다. 


동화마을을 나오는 길에 아기자기한 예쁜 소품샵들이 곳곳에 보였다. 양초와 유리공예, 귀여운 패턴의 패브릭과 양말들, 정성이 담긴 독립서적 큐레이션과 비즈공예들을 신나게 구경하고 난 뒤, 내 손엔 뜻밖에도 얄팍한 모양의 돋보기가 하나 들렸다. 좀 더 관심과 시간을 들여 가까이,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껍데기 속의 알맹이를 볼 수 있다는 깨달음을 물성으로 기억하고 싶었나 보다. 



[ 머물렀던 곳 ] 

 이번 숙소는 아주 최근에 지어진 곳과 아주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곳, 이렇게 극단적으로 다른 두 곳을 고르게 되었다. 금년 5월에 열었으니 신상 호텔이었던 신라 이호테우는 공항에서 가까웠고 종일 비가 내렸던 여행 첫날, 거의 모든 객실에서 조망할 수 있는 이호테우 해변을 바라보며 멍 때리기에 좋았다. 우리말이 아닌 것 같은 낯선 어감의 '이호테우'는 '이호'가 지명, '테우'는 '통나무를 엮어 만든 배'를 뜻한다. 부력이 뛰어나 해조류를 채취하는 것은 물론, 해녀들의 이동수단이 되기도 했다고 한다. 로비가 있는 1층부터 2~3층 높이까지 원통 모양으로 과감하게 홀을 내어, 그 안을 미니정원 같은 조경으로 꾸민 설계 디자인도 흥미로웠다. 홀의 천장은 막히지 않고 뚫려 식생들이 자연의 비를 마시게 되어 있었다. 마지막 서귀포의 일정을 보낸, KAL 호텔은 무려 1985년에 개관한 5성급으로 제주도가 신혼여행지로서 선망받던 바로 시절을 상상해보게 하는 곳이었다. 호텔 그 자체뿐만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정원처럼 이어지는 정자가 놓인 산책로와 남태평양의 해변, 제주 올레길과의 연결까지 지상낙원 같은 콘셉트를 구현한 점이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실감되어 놀라웠다. 모두 아름다운 곳들이었지만, 다음번의 제주는 귤밭과 함께 하는 스테이를 시도해보고 싶다.   


                     


이전 05화 다시 만난 8월의 대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