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는 행복

행복을 향한 여정의 다양성을 위하여

by Ring finger

몇 년 전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을 보며 이거야!라는 환희와 경탄으로 충만했던 나는 ‘픽사 스토리텔링 20가지 법칙’을 구글링 하며 필사하는 저돌적인 늦깎이 팬이 되었다. 그리고 내가 머무는 도시에서 올해 구정 무렵 개봉했던 「Soul」을 대단히 고대한 끝에 보았고, 뜻밖에도 이 영화는 내게 감탄표가 아닌 물음표로 남아있다. 그간 존경해 마지않던 픽사의 세계관에 그대로 빠져들지 못하고 삐딱하게 서서 불편함을 느낀 건 왜 일까.


바로 ‘일’에 대한 몰입을 묘사하는 극단적인 두 가지 방식에 나는 아프고, 억울하고, 배신당한 듯한 서운함을 느꼈다. 영화는 먼저 ‘Being in the zone’으로 표현되는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준다. 짙은 보랏빛으로 영롱하게 빛나는 그들은 공연, 창작과 같은 예술적 몰입의 순간, 완전한 물아일체를 이뤄 ‘육’은 현생에 놓인 채 ‘신’의 모습으로만 황홀경 속에 두둥실 떠오른다. 나를 서글프게 한 건 이와 대조를 이루며 등장한 ‘Being a lost soul’이었다. 같은 배경의 무대 속에서 전자는 하늘에 떠있고, 이 lost soul들은 빛이 사라진 암흑 속에서 오로지 땅만 바라보며 무언가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공허한 눈동자에 몸은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이들은 누구인가.


영화는 다음 장면에서 이 불행한 ‘신’들의 ‘육’이 놓인 현생을 비춘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나에게 너무나 익숙한 전형적인, 숨 막히는 직장 속의 일상이었다. 그저 ‘일’과 ‘성과’, ‘경쟁’ 등에 함몰되어 주위 사람들에 대한 관심, 소통의 끈을 놓아버리는 그 순간, 당신은 영혼 상실의 존재가 될 거라는 팩트 폭격이었다. Lost soul, 그것은 오래지 않은 지난날, 혹은 가끔의 오늘에도 유효한 나의 초상이었다.


생각하는 고로 존재한다고 했던 데카르트처럼, 거대 폭력의 기계가 되지 말자했던 찰리 채플린처럼, 조직 안에서의 나도 어떤 상황에서든 주체성을 잃지 말자 다짐하던 날이 있었다. 당시 내가 주체성의 수호를 위해 선택한 수단은 어쩌면 당연하게도 ‘일’이었다. 9 to 6의 계약된 시간을 견딤으로써 달성되는 '일'은 수동적 형식으로 보였다. 그 나약함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시키지도 않은 일을, 시키기도 전에 내 주체적 의지로 해내야 하며, 그것이 다른 이들과 다른 내 가치를 증명하고 규명하는 실체가 될 것이라고 굳게 믿어 버렸다. 그 결과 팀워크라는 명목 하에 서식하는 월급 루팡들의 존재를 경멸했고, 그로 인해 실제 가용한 인원이 줄어도 해야 할 일은 그대로인 업무량 절대보존의 법칙에 절망하며 스스로 창조한 고통의 세계에 잠식되어 갔다. 동료와 선후배에 대한 이해와 배려는 시간 낭비며, 나만의 참신한 아이디어와 집요한 디테일로 점철된 보고서만이 내 존재를 밝히는 등대처럼 느껴졌다. 그러길 몇 해, 황폐해진 손에 쥐어진 일말의 성과가 얼마나 보잘것없는지 처절하게 깨달은 후에야 나는 조금씩 그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올 수 있었다. '나는 일이 아니다' 라는 꽤 늦은 후회와 함께.


그러나 나를 슬프게 한 건, Lost soul로 소환된 내 과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일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지킨 자는 천국에 이르고, 일을 통한 욕망에 잠식된 자는 지옥에 떨어지는 듯한 단 둘 뿐인 일의 결과론적 세계에 나는 절망했다. 나라고 ‘Being in the zone’을 갈망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그 아름다운 세계는 때로 순간적이며, 선택받은 소수만을 허용하는 좁은 문이 되어 이 세상 다수를 이루는 보통의 사람들을 수없이 좌절하게 하지 않았는가. 진입의 실패를 맛본 자들이 방황 끝에 결국 Lost soul이 되어버리는 현실의 과정은 영화적 상상에 맡길 수밖에 없는 것일까.


이런 고민의 지점에서 떠올린 영화 ‘Whiplash’의 주인공 Andrew와 그를 채찍질하는 Fletcher 선생은 도덕적 선을 넘어버린 예술가들로서 어떤 세계에 속한다고 볼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그 광기 어린 공연은 예술에 대한 순수함을 잃었으므로 zone에 초대받지 못할 것인지, 반항의 질주를 멈추지 않던 Andrew의 대결 상대는 Fletcher인지 Lost soul의 세계인지는 좀 더 곱씹어봐야 할 것 같다. 그러나 내 지나친 팬심은 어쩌면 또 다른 영화 ‘Lala land’의 오디션 scene과 같은 위로를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꿈꾸는 바보들에게 바칩니다. 갈갈이 찢어진 가슴에게, 망가져버린 삶에게’라는 그 노래를 닮은 중간계를.


그러나 「Soul」이 보여준 삶에 대한 조금 다른 관점이 많은 이들에게 공명을 일으킨 것은 사실이다 . 나와 함께 영화를 관람해 준 일본과 멕시코에서 온 친구들은 조금 심오하지만 좋았다는 평이었다. 하지만 큰 감흥은 없는 듯한 모습에 약간 김이 빠졌는데, 내 또래로 보드게임 사업을 하는 미국인 영어 튜터의 반응은 조금 더 뜨거웠다. 독립을 준비하며 미래에 대한 제법 뚜렷한 비전과 목표를 그리길 기대받던 20세 즈음이 본인에겐 엄청난 부담이었다는 것이다. 당시 그러지 못했던 자신이 ‘루저’로 느껴졌고 꽤 오랜 방황의 시간을 보내다, 최근에 대학친구들과 미니 보드게임 사업을 시작했다고 했다. 모든 삶에 거대한 의미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영화의 메시지에 충분히 공감되었고 비로소 위로를 받았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이렇게 혼란스러웠던가. 다시 한번 호흡을 가다듬고 생각해본다. Being in the zone이 아니면 Lost soul이라는 이분법적 관점은 정녕 픽사가 만든 것인가, 내가 만든 것인가. 이들의 본질은 서두에 밝혔듯 ‘일’에 대한 몰입의 서로 다른 결과값이다. 그런데 내가 심히 간과한 것은 두 곳 모두 아직 살아있는 현생의 존재가 극도의 몰입을 통해 ‘육’과 ‘신’이 분리된 ‘순간’에 진입하는 세계라는 점이다. 주인공처럼 나 또한 끝까지 집착을 버릴 수 없었던 Being in the zone은 행복의 종착점이 아니다. 오히려 버스를 타고 가다 우연히 발견했으나 지나칠 수밖에 없는 어떤 한 장면처럼, 인생의 한 순간에 자연스럽게 스쳐가는 찰나일 뿐이다. 아무리 위대한 예술가라 할지라도 살아있는 존재로서는 그곳에 영영 머무를 수 없는 것이다. 슬프게도 장기 체류에 대한 가능성은 Lost soul이 더 높다. 살아있는 존재이되 어떤 형태의 zone에 들어가겠다는 집착으로 ‘신’을 잃어버린 존재. 그가 잃어버린 ‘신, soul’은 뭘까.


결국 그것은 매 순간순간을 그저 흘려보내지 않고 자신의 오감을 펼쳐 내 것으로 생생하게 받아들이고, 다른 존재와 자신을 끊임없이 연결시키는 어떤 주체적 의지가 아닐지 생각해본다. 이제야 비로소 내가 놓친 영화의 존재들과, 왜 없는 것인지 원망했던 제3의 세계가 천천히 들어온다. 고양이와 이발사 친구, 거리 예술가, 심지어 말썽꾸러기 22호까지도 즐거이 머물렀던 그곳은 결국 육과 신이 결합된 지극히 정상적인 우리의 일상이었다. 때로 이루고 싶던 꿈과 목표에 좌절하고 상처 받을 지라도 zone에 대한 집착으로 '신, soul'을 잃어버리면 바로 이 '일상'의 평화까지도 잃고마는 것이다.


너무 당연한 나머지 존재 자체를 잊어버리고 마는 지금, '육'과 '신'이 함께하는 일상이야말로 내 진정한 삶의 무대이자 공간이고 세계이다. 이 일상 속에서 내 삶의 방향을 결정해나가는 자유와, 내가 잘 할 수 있는 영역의 실력을 쌓아가는 유능과, 서로를 소중히 여겨줄 관계의 균형을 유지하려고 힘쓰는 것. 그것이 꽤 추상적으로 느껴지는 ‘행복’에 이르는 길 중 하나일 거라는 행복연구센터 최인철 교수님의 강연이 떠오른다. 그렇다면 내가 지난 날 추구했던 내멋대로 일하는 행복은 기껏해야 2/3의 행복이다. 코로나로 직장 공간이 분산된 시대의 나는 어떻게 남은 1/3 조각의 퍼즐을 지혜롭게 맞춰갈 수 있을까. 그런 관계를 직장에서까지 바란다는 설정 자체가 무리인 걸까. 극단이 아닌 적당한 균형감각. 오늘의 출근길에 들려진 언제나의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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